* 해설서에서 :
시간을 녹이고 깨달음을 뿜어내는 소리 / 권도희(서울대 동양음악연구소)
소리로 치르는 의식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행하는 가장 기본적 의식이 조석예불(朝夕禮佛)이다. 조석예불이란 매일 새벽과 저녁에 치르는 일상 의식이다. 특히 새벽예불은 불도(佛道)가 진동하는 세상을 여는 의식인데,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새벽 예불의 의식 절차는 도량석, 종송, 사물의례, 예불·발원·반야심경·금강경의 독송(讀訟)의 순이다. 도량석은 기상 시간을 알리고 도량을 정화하는 의식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대중스님들은 도량을 도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종송은 부전 스님이 종을 치며 중생의 구제와 수행자의 성불(成佛)을 비는 절차다. 사물의례는 불전사물(佛殿四物, 법고·범종·목어·운판)이라고 부르는 네 개의 거대한 악기를 두드리며 지상·하늘·바다·지하에 사는 모든 중생들의 해탈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예불독송은 다게례와 지심귀명례(팔정례)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다게는 부처님께 깨끗한 물을 공양하는 의식이고, 팔정례는 삼보(三寶,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부처, 불타가 말한 교법, 교법을 따라 수행하는 승려)에 귀의하는 의식이다. 발원은 삼보에의 귀의와 성불하기를 염원하는 의식이고,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독송은 경전을 외움으로써 불도를 선명하게 깨우치고자 하는 의식이다. 반야심경은 지혜와 공(空)에 대해 써놓은 짧은 경전으로 그 전체가 독송된다. 금강경은 우리나라 조계종의 기본 경전으로 부처님의 강의를 적어놓은 것인데, 그 일부만 독송된다. 새벽 예불은 반복되는 일상의 연장이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불법(佛法)을 수행하기 때문에 장엄하다.
이 음반에는 천년고찰(千年古刹) 송광사의 의식을 담았다.
송광사의 예불에는 남다른 것이 있다. 예불의 중심에 소리를 두기 때문이다. 새벽 예불의 각 절차는 소리로도 단락이 나누어진다. 도량석에서는 오로지 목탁소리가, 종송에는 쇠종소리와 부전스님의 독송 소리가, 사물의례에는 넓다란 가죽으로 된 법고 소리, 육중한 쇠로 만든 범종 소리, 두터운 나무통으로 만든 목어 소리, 구름 모양의 판판한 쇠로 된 운판 소리가 차례대로 이어진다. 사물이 끝나고 나면 매 절차는 독송으로 진행된다. 독송의 각 절차마다 음악적 변화가 무쌍하다. 다게례에서 부전스님이 맑은 소리로 경건하게 독송을 하고 나면 이 소리를 대중이 “원수애납수”로 받아 우람하게 반복하여 합창한다.
팔정례에 이르면 본격적인 예불문 합창이 시작된다. 발원까지 엄격한 형식으로 합창이 진행되다가, 반야심경에 이르면 독송 소리는 절정에 도달한다. 경문의 완결성과 독송의 음악적 긴장감이 반야심경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합창은 감성보다는 지성으로써 불교의 가르침에 접근하도록 만든다. 이 웅장한 소리는 특별한 공간에 놓여있다.
새벽 3시. 송광사의 중앙 마당과 사방의 대웅보전, 종고루, 승보전, 지장전 그리고 이를 겹겹이 둘러싼 여러 가람 사이로 대웅보전의 목탁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목탁소리가 독송소리로 바뀌면서 대웅보전의 소리는 가람 사이를 뚫고 나오기 시작한다. 소리는 대웅보전 앞 마당을 가로질러 종고루로 넘어가 사물소리로 바뀐다. 새벽 이슬에 젖었던 북 소리에 힘이 차 올랐을 무렵 범종 소리가 이어진다. 범종 소리는 법당과 마당을 수십 번 오고가면서 불사(佛舍)를 소리의 공간으로 만들 준비를 다한다. 이어지는 목어와 운판의 소리는 새벽에 만들어진 어떤 소리도 흩어지지 않도록 두껍게 소리 공간의 외벽을 친다. 사물소리가 끝나면 일상 공간은 소리의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완성된 소리의 공간에 드디어 인성(人聲)이 차기 시작한다. 법당 안에서 대중스님들의 목소리가 합쳐서 울리면 송광사는 완전한 소리의 세계가 된다.
새벽 예불 소리는 우리를 감동과 경건으로 인도한다. 새벽 찬 바람을 녹이는 독송 소리는 장단과 율을 타고 불도를 전달하고, 어둠을 가르는 사물 소리는 사방을 진동시켜 뭇 중생을 깨우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산사의 감동을 흡입했던 마이크가 대웅보전에 안치된 삼세불의 귀 위치에 놓였다는 점은 우연이었을까? 인간이 아니라 삼세불의 귀에서 가장 조화로운 음향을 찾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소리로 성불을 염원했기 때문이리라.
시간을 녹여낸 소리
불·법·승, 삼보 가운데 송광사는 승보 총찰이다. 송광사는 승보 총찰답게 범패승이 아닌 일반승의 예불소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광사의 예불소리가 떨쳤던 배경에는 고승의 가르침과 오랜 역사가 있다. 송광사는 크고 작은 일에 상관없이 경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 중에서도 법열의 경지를 경험하게 하는 독송의 음악성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왔다. 송광사의 독송에 대한 관심은 대략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송광사를 부흥시킨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그의 저술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독송을 할 때 남들 소리를 따라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곡조를 잘 알아야한다고 강조했다.
현재까지 송광사의 독송에는 보조국사의 가르침이 그대로 살아있다. 지금 송광사의 예불은 어느 사찰보다 음악적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사를 살펴보면, 7세기 이전에 이미 불교음악이 있었고, 예불 의식도 7세기 무렵에는 치러졌다고 한다. 따라서 예불 음악의 역사는 1,300년이 넘는 셈이다. 현재 새벽 예불의식에 포함되어 있는 다게례는 신라이후로, 축원과 조석예불은 고려이후로 정착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의식이다. 그리고 종송에는 고려 이후로 만들어진 여러 게문(偈文, 불교의 가르침을 적은 시)들이 중첩되어 있다. 심지어 반야심경과 팔정례의 독송에는 한국 현대 불교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 송광사의 예불에는 이 긴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두운 새벽, 성불의 염원을 모아 우주 공간으로 소리를 품어 내는 송광사에 경의를 표한다. 소리 속에 있으면서 성불이 가까이 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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