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에서 :
국창 임방울 판소리 대전집을 출반하며...
국창 임방울 선생은 명실 공히 우리나라 판소리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창이었습니다. 선생은 국창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독특한 소리세계를 이룩하여 민중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와 남북분단의 암울하던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애원 처절한 계면조에 시대의 아픔을 담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러면서도 호방한 우조의 세계도 아주 멋지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해학과 풍자, 그리고 애환을 이면에 소리결 맞게 표출하여 민중들의 가슴에 임방울제의 생명력이 가득 담겨있는 완숙한 소리를 남겼습니다.
또한 국창 임방울선생이 남긴 주옥같은 음반 가운데서 상태가 가장 좋은 것과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임방울선생 육성 녹음테이프 등을 수집, 수궁가 2장, 적벽가 2장, 도막소리와 오케유성기음반 1장, 공연실황 모음 1장 등, CD 6장 분량의 음반을 출반합니다.
이 음반은 임방울 판소리의 결정판으로, 선생의 높은 예술적 경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다시없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애호가들과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기회로 임방울선생의 소리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8월
(사)임방울국악진흥회 이사장 김 중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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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울의 활동과 음반
배연형(동국대학교 교수,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단장)
임방울(1904. 4. 25.-1961. 3. 8.)은 근대 판소리사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긴 명창으로, 그의 삶과 예술은 이제 대중들에게는 거의 신화처럼 인식되고 있다. 2000년 10월 16일에는 고 임승근(林承根)에게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됨으로써 그의 예술적 공로를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절차도 마쳤다. 임방울은 이제 근대 판소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연구되고, 또 추모되고 있다. 근대 판소리사는 임방울을 기점으로 임방울 이전 시대와 임방울 이후 시대로 나누어진다. 임방울을 분수령으로 현대 판소리의 면모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임방울은 본명이 임승근이며, 1904년 4월 25일 전남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현 광주광역시)에서 임경학의 3남(일설에는 6남)으로 태어났다. 임방울은 세습적인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외삼촌 역시 서편제 판소리의 대가요, 5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는 김창환이었다. 임방울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30여 년간 판소리 명창으로 대중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일세를 울렸고, 1961년 3월 8일 서울 중구 초동 51번지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향년 57세였다.
근대사회에서 판소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왔다. 조선조 판소리는 주로 관장들의 놀음에서 연행되었다. 개화기 이후 판소리 공연시장은 대중사회로 그 중심이 옮아갔다. 1899년에는 조선에 유성기가 처음 소개 되었고, 1902년에는 근대식 협률사 극장이 세워졌다. 또한 1907년 첫 한국음악 유성기음반이 발매되었고, 1926년 7월에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험 전파가 처음으로 송출되었다. 유성기, 라디오 방송과 같은 미디어의 발달은 대중문화 보급에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고, 극장공연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대중들이 최고의 명창 가수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극장이 없는 지방이나 시골에는 포장을 친 가설극장이 들어섰다. 영화, 신파극, 대중가요, 코미디, 서커스, 마술 등 여러 종류의 대중예술과 함께 판소리와 창극 또한 가설극장에서 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대중들의 절대적인 사랑은 곧 많은 돈과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근대는 곧 대중의 시대였고, 대중적인 인기의 중심에는 명창과 가수가 있었으며, 그 중심에 이화중선이 있었고, 또 임방울이 있었다.
임방울의 인기와 활동에 대한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졌으므로 중복을 피하고 여기에서는 이 음반에 실린 녹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공식적인 기록에 임방울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29년 가을이었다.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다. 이를 계기로 9월 15일부터 6일간, 무명회(無名會) 주최(매일신보사․경성방송국 공동 후원)로 매일신보사 강당 내청각(來靑閣)에서는 ‘조선명창 대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에 출연자는 김창환을 비롯하여 공창석(식), 임승근(방울), 박녹주, 김초향, 고수 한성준, 거문고 백낙준, 가야금 안기옥 등이었다. 이어 명창대회 기간 중인 1929년 9월 14일에는 임방울의 첫 라디오 출연 방송기록도 남아있다.
<조선일보> 1929. 09. 14.(토) 22:30- 南道短歌 獨唱 林承根/韓成俊(鼓手)
<조선일보> 1929. 10. 02.(수) 13:00- 南道短歌 獨唱 林承根/韓成俊
이 연주회가 경성방송국과의 공동주최였기 때문에 임방울의 방송 출연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어 9월 25부터 약 20일간 경성부 연지동 가설극장에서 열린 ‘이동백일행대공연’에서 임방울은 이동백, 조진영, 이화중선, 이중선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25살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조선명창대연주회에서 처음 데뷰하고, 방송국 출연이 이루어졌으며, 이동백 일행의 가설극장에까지 진출한 것은 신인 임방울의 첫 출발이 그만큼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방울의 인기는 곧바로 음반의 취입으로 이어져서 1929년 11월에는 콜럼비아 레코드에 발탁되어 일본으로 첫 취입 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신문에는 “대판(大阪) 취입소까지 조선 예인을 데리고 가서 취입하기로 결정되어 지난 구일과 십일 양일에 이차에 나누어 경성역을 출발하였다.”(조선일보:1929.11.14)”고 한다. 임방울은 이때 <명기명창> <가난타령> <쑥대머리> <호남가> <옥중상봉> <흥보 비난 데> 등 6곡을 취입했다. 이때 취입된 <쑥대머리>가 바로 임방울의 출세작이 되었다. 콜럼비아 유성기음반은 이미 모두 복각되었다.
이때부터 임방울은 대중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지금까지 필자기 밝혀낸 임방울의 유성기음반은 독집이 137면에 이른다. 창극은 빅타판 『춘향전전집(38면)』, 오케판 『춘향전전집(40면)』 『흥보전전집(24면)』이 있으며, 여기에서 임방울은 이몽룡, 흥보 역을 맡았다. 독집 음반을 낸 회사는 콜럼비아(1929년, 1932년), 시에론(1933년), 오케(1933-1941년), 빅타(1937년), 고라이(1938년) 등이 있다. 판소리 명창 중에서 유성기음반을 많이 취입한 명창은 독집으로만 계산하면 이화중선(160면), 임방울(137면), 박녹주(125면) 등의 순이다.
임방울의 첫 취입은 1929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였고, 또한 1937년 『춘향전전집』 취입을 계기로 빅타 레코드에서도 일부 음반을 취입하였다. 그렇지만 임방울이 주로 취입한 곳은 오케 레코드였다. 오케 레코드는 1933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취입이 중단될 때까지 임방울이 가장 많은 음반을 취입한 회사였다. 임방울 유성기음반의 절반 이상이 오케 레코드에서 나왔으며, 그래서 가장 다양한 임방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현재 콜럼비아나 빅타 레코드는 음반을 찍어내던 스탬퍼(금속원반)가 남아있고, 임방울의 음반도 모두 복각되어 깨끗한 음질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오케, 시에론, 고라이 등은 원반이 남아있지 않아 직접 유성기음반을 재생하여 복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임방울의 음반은 매우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이 수없이 틀어댔기 때문에 양호한 상태의 음반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오케 레코드의 복각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임방울국악진흥재단의 임방울전집 출반을 계기로 지금까지 복각되지 못했던 오케 레코드를 일부 복각하게 되었다. 물론 음질이 열악한 부분이 있지만, 오케 음반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임방울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볼 수 있으므로 임방울 연구에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일부 음질이 좋지 않은 음반은 우선 듣다가 성한 음반이 발견되는 대로 차차 바꾸어나가면 될 것이다.
해방 공간에서 임방울의 음반은 취입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여건이 혼란스러운 데다 변변한 레코드 회사가 없어 기름틀을 개조한 프레스 기계로 조악한 수제품 레코드를 찍어 팔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톱스타에게 충분한 개런티를 줄 회사도 없을 뿐 아니라, 임방울의 음반은 일제강점기에 팔렸던 수많은 음반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므로 시급하게 취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남은 음반을 계속 틀어댔기 때문에 임방울의 유성기음반은 성한 게 거의 없다.
임방울의 소리가 다시 녹음된 것은 한국전쟁의 화약 냄새가 가시기 시작하는 1950년대 후반이었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지만, 1956∽1957년 무렵 임방울은 스튜디오에서 장고 반주로 <쑥대머리>와 <군사설움타령> <녹수청산> <호남가> 등을 녹음했는데, 이것은 원래 유성기음반으로 제작될 것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미루어졌다가 뒤늦게 신세기레코드에서 1968년 무렵 LP 음반(新世紀레코오드株式會社 민1244 國唱 林芳蔚特選曲 쑥대머리, 1LP)으로 제작되었다. 근래에 전축이나 카세트테이프로 듣던 <쑥대머리>가 모두 이 녹음이다.
또한 임방울은 도막소리로 적벽가(적벽화전-새타령, 약16분), 수궁가(왕왈 연하다-고고천변, 말을 하라니-백마주를 바삐 지내, 약40분) 등 55분가량의 녹음을 남겼는데, 모두 한일섭이 북으로 반주 것이다. 이것은 녹음상태로 보면 스튜디오 녹음은 아닌 듯하지만, 의외로 음질도 좋고, 임방울의 소리 특징이 매우 잘 담겨있는 녹음에 속한다. 역시 신세기 레코드에서 LP 음반(新世紀蓄音機株式會社 製作 SLN.10628 林방울唱劇調 第一選集 唱林방울/鼓手韓一燮 1.三國誌中에서 赤壁歌 2.水宮歌 3.水宮歌 4.水宮歌 10인치 2LP)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감색 표지에 향로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바로 이 음반이다. 이것은 카세트나 CD로 나온 적이 없어 근래에는 잊혀진 녹음이다.
임방울의 대표작이라면 아무래도 국립국악원에서 공연했던 <수궁가>(1956)와 <적벽가>(1957) 완창 실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실황은 둘 다 전바탕이 완전하게 릴 테이프에 담겨 있으며, 판소리 역사상 첫 완창 녹음이다. 이를 통해 임방울의 빼어난 공연력을 살펴볼 수 있고, 임방울 판소리 바디의 완전한 모습도 알 수 있기 때문에 판소리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녹음이다. 이것은 나중에 전판이 LP 음반으로 나왔기 때문에 지금도 이것을 들을 수 있다.
또한 임방울의 방안소리 실황 테이프가 일부 LP 음반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들 음반은 모두 임방울의 사후에 제작되어 고인을 회상하는 애호가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임방울의 음반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재발매되지 못하거나 이리저리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제작되는 바람에 원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또한 본래 모습을 알 수 없는 형태로 돌아다니다 보니 일반인들은 임방울의 예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제 ‘임방울국악진흥재단’이 나서서 지금까지 나온 음반을 집대성하여 본래 모습을 찾게 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는 이제 임방울 음반의 정본(正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각 CD에 수록된 곡들의 자세한 녹음 경위와 그 가치를 밝히기로 한다. - 이하 생략. 음반 해설서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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