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에서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雲山 송순섭
東便制 赤壁歌 唱本
Dongpyeonje Jeokbyeokga by Song Sun-seop, master pansori performer
창 : 송 순 섭
chang (singing)/ Song Sun-seop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
고수 : 박 근 영
barrel drum/ Park Keun-yeong
·송원 박오용 선생께 일산 김명환바디 판소리고법 사사
·전국고수대회 대통령상 수상(1992)
·송원장단연구회 회장
동편제 적벽가 음반을 내면서
송 순 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이번에 제가 고희를 맞아 <동편제 적벽가> 음반을 내게되니 감회가 새삼스럽습니다. 일찌감치 박봉술 선생님께 배우던 이 <동편제 적벽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공부를 해갈수록 더욱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음반을 내고자 녹음을 마치고 거듭 들어보지만 아직도 제 성에 꽉 차지는 않고, 어딘지 미진하여 망설이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 삶에 하나의 획을 그으면서 앞으로 남은 삶도 이 소리의 완성을 위하여 매진하고자 하는 각오로 음반을 냅니다.
언제건 이 소리를 부를 때면 박봉술 선생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선생님은 이 <적벽가 사설> 에 오자(誤字)가 있으면 잘 고쳐서 불러도 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원래 호기심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아 여기저기 책도 뒤지고 학자 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물어, 뜻이 어렵거나 잘못 전달된 대목을 고치고 다듬으면서 이 소리를 해오고 있습니다. 판소리에 사설의 내용과 고저장단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이 소리판에 실천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동안 판소리에 입문하여 갖은 고생을 거쳐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옹색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힘들다고 남의 것을 넘겨다 본 적도 없으며, 나름대로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동편제 적벽가>로만 승부를 걸어 전주대사습에 도전하였으며, 칠전팔기하여 드디어 장원했던 기억이 제 삶에서 가장 생생하고 행복합니다.
‘동편소리는 서슬이 좋다’는 말이 이제야 가슴에 와 닿고 있는 중입니다. 소리의 이면이 비로소 느껴집니다. 요즘에 이르러서야 소리하는 즐거움이 한층 새롭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박봉술 선생님의 은혜를 기리며, 서슬깊은 소리로서 보답하고자 합니다.
부족한 음반이지만 늘 여러분의 곁에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소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동안 제 소리를 찾아 아껴주신 여러 귀하신 분께도, 그리고 이 음반을 내는데 도와주신 여러분께도 두루 깊이 감사드립니다.
송순섭 명창의 <동편제 적벽가>
유 영 대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송순섭 명창은 올해로 고희가 된다. 예전같으면 이 정도의 어른은 집에 계시고 바깥출입을 조심해야 할 것이지만, 송순섭 명창은 여전히 소리판에서 기운이 넘치고 담백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서슬이 멋지다.
송순섭 명창은 소리의 고향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송순섭 선생은 일찍부터 소리세상의 매력에 듬뿍 빠진 분이다. 당대의 명창 소리를 섭렵하면서 스스로의 소리를 완성해간 궤적이 돋보인다. 선생은 1957년에 공대일 명창으로부터 <흥보가>를 사사한 이래, 김준섭 명창에게 <심청가>를,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김연수 명창에게 <춘향가>를 사사하였다.
송순섭 명창은 소리 습득에 집념이 대단하며 의욕이 넘친 분이다. 선생은 박봉술 명창을 다시 찾아 <수궁가>와 <흥보가>를 익혀서 판소리 5바탕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박봉술 명창과의 만남을 통하여 진정한 소리세상의 묘체를 터득한 셈이다. 송순섭 명창은 박봉술제 <적벽가>를 통하여 인간문화재의 칭호를 받았다.
송순섭 선생의 <적벽가>는 흔히 ‘송판’이라고 별칭되기도 하는, <동편제 적벽가>이다. 동편제 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으로 소리의 선을 굵게 짜나가고, 남성적이면서 고풍스런 소리제로서 남다른 공력이 요구되며, 송만갑 박봉술 명창의 뒤를 이어 송순섭 선생이 동편제 판소리의 대통을 이어받고 있다.
<적벽가>는 <삼국지연의>가운데 손권과 조조의 적벽강 싸움과 그 앞뒤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흔히 <화용도>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특히 조조가 화용도에서 패퇴하여 관우에게 용서받는 대목의 장관을 기념비적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군사설움타령’, ‘동남풍 비는 대목’, ‘자룡활쏘는 대목’, ‘적벽대전’, ‘화용도’ 등으로 나뉘어진다.
<적벽가>는 판소리가 양반층이 애호하는 시절에 맞추어 판소리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적벽가>를 잘 불렀던 명창들로는, 19세기 초반 순조 때의 송흥록, 모흥갑, 방만춘, 주덕기가 있다. 그리고 이보다 좀 후대인 19세기 중반 철종 때의 명창으로 박유전, 박만순, 정춘풍, 김창록, 서성관, 이창운 등이 적벽가의 명창들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까지 활약한 <적벽가>의 명창으로는 조기홍, 박기홍, 송만갑, 유성준, 이동백, 김창룡, 장판개, 조학진, 임방울, 김연수, 강장원, 박봉술, 정권진, 박동진, 정광수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적벽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송순섭으로 이어지는 ‘송판’과,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정광수에게로 이어지는 ‘유성준제’, 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으로 이어진 ‘정응민제’, 정춘풍-박기홍-조학진-박동진으로 이어진 ‘조학진제’가 있다. 송순섭 명창의 <적벽가>는 바로 ‘송판’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송순섭 선생의 <적벽가>는 그 사설이 치밀하고 모두 이치에 맞다. 판소리 사설은 전통시대 상하층 문화의 총화이다. 따라서 어떤 대목은 주석이 없으면 해석이 까다로우며, 어떤 부분은 학자들도 해독이 어려워 아예 주석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송순섭 명창은 소리 수업을 시작할 때, 제자들에게 사설의 뜻과 고사성어까지 설명하여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실기 지도를 시작한다.
송선생은 호기심이 많은 분이어서, 일단 소리를 접하면 그 소리의 내용과 이면을 모두 이치에 맞게 궁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용을 알만한 분을 부단히 찾아 다녀 사설의 속내를 확인하였다. 쉽게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면 당대의 석학을 찾아가 그 내용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구사하는 판소리 사설의 일자일구(一字一句)가 정연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작업과정을 통하여 낸 책이 작년에 상재한 <판소리 동편제 적벽가>이다. 선생은 사설의 정확한 의미를 중시하고, 그것을 소리로 제대로 전달하고자 힘쓰는 분이다. 사설집을 두고 송선생의 <적벽가>를 들어가노라면 그 감흥이 한층 더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송순섭 명창의 소리 스타일은 중후하고 단아하다. 탁한 저음이 매력적이며, 고음의 구사에서도 원하는 만큼 질러낼 수 있는 기량을 가진 분이다. 소박한듯 하면서도 화려하며, 담박하면서도 기름지기도 하다. 호령조에 능한가 하면 애원성에도 절제된 한이 스며있다. 송순섭 선생의 이같은 점이 그를 우리시대의 광대로 만든 미덕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송순섭 명창은 ‘판’의 진정한 의미를 잘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분이다. 청중들의 취향과 반응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객석의 요구에 적절히 반응하여 박수와 환호를 적절히 유도해내는 진정한 광대의 모습을 선생은 가졌다. 그래서 선생의 소리는 판박이처럼 꼭 같지 않고, 공연장의 상황과 객석의 반응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는 소리를 구가하는 것이다. 이 음반은 송순섭 명창의 기량이 농익은 맛으로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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