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에서 :
김죽파 선생님을 회고하며...
1989년 1월, 한 겨울의 바람이 몹시도 차갑던 그 무렵 김죽파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지도교수시던 이재숙 선생님의 권고로 나는 김죽파 선생님의 생생한 성음을 마음과 손끝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특별한 애착으로 김죽파류 산조를 연주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을 생각하면, 남다른 안목으로 나를 지도해주신 이재숙 선생님의 배려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는 다스름-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로 구성되어있다. 다스름은 羽調風으로 연주되는데 ‘지’(e)줄에서의 흘림과 ‘땅’(d)줄에서의 가벼운 농현 등 김죽파류 산조의 根幹을 이루는 독특한 특색들이 다채롭게 담겨있다. 진양조는 다스름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전반부는 꿋꿋한 羽調로 연주되다가 계면성 羽調로 넘어간다.
돌장을 거쳐 平調에 이르면 점차 ‘당’(g)을 폭넓게 떨고 ‘땅’(d)을 가볍게 꺾는 표현이 잦아지다가 界面調 선율로 마무리된다. 중모리는 가벼운 경드름으로 시작하여 담백한 강산제로 연결되고 후반에 상청에서 다소 急한 리듬을 유지하며 phrase가 끝나는 종지감을 준 후, 우조로 이어져 계면조로 맺는다.
중중모리는 강산제로 연주되는데 곡의 마지막까지 꾸준히 지속되는 빠른 리듬감에 오른 손의 세분화된 다이나믹과 왼손의 경쾌한 농현이 적절히 조화되어 긴장감을 더욱 배가시킨다. 자진모리는 여러 調(계면조, 우조, 강산제 등)를 통하여 나타나는 독특한 맛과 개성이 다양한 리듬패턴과 흥겹게 어우러진다.
휘모리는 장단과 엇박으로 연주할 때가 많으며, 틀린 듯 하나 꼭 들어맞는 장고와의 미묘한 合은 다이나믹을 더 해준다. 상청과 하청을 오가며 격렬하게 몰다가, ‘당’(g)줄에서의 느리고 깊은 농현으로 시작되는 무장단 가락은 ‘긴장과 이완’이라는 산조의 본질을 새삼 확인하게 해 준다 하겠다.
끝 곡으로 연주되는 세산조시는 다른 산조에는 휘모리 혹은 단모리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세산조시는 경쾌하면서도 담담한 선율로 시작하였다가 중반에 이르게 되면 빠르게 몰아친다. 특히 오른손을 현침 안쪽으로 들여 絃을 살짝 막고 연주하는 C.S. 부분은 점차 고조되면서 격정적인 climax로 향한다. 후반에 이르면 계면조로 마무리되는 다른 산조들과는 달리 변청강산제로 연주하여 더욱 색다른 느낌을 준다.
金竹坡(본명 金蘭草 1911∼1989)선생님은 산조의 창시자인 金昌祖(1865∼1919)의 손녀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탓에 그의 제자인 韓成基(1899∼1950)로부터 가야금산조를 전수받았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는 197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에는 전바탕의 연주가 50여분에 달하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다. 선생님의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과 당신의 삶으로부터 투영된 섬세함과 단아함이 그대로 녹아있는 김죽파류 산조는 현재까지도 가장 즐겨 연주되는 가야금산조 중의 하나이다.
아담한 사랑방에서 가만가만 줄을 고르시던 선생님의 그 고운 섬섬옥수는 아련한데...
애절하면서도 기품있는 농현과 무수한 想念이 묻어나는 애달픈 微分音들, 창공을 가르는 듯한 맑고 투명한 성음은 어제 일인 듯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곽 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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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수은 연주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 같고도 다른 ‘동근이상’의 세계를 맛보다 -
저는 국악의 재미를 묻는 이들에게 ‘동근이상(同根異相)’의 의미와 재미를 말하곤 합니다. 동근이상이란 한 부리에서 여러 모습을 보다, 뿌리는 같되 한 뿌리에서 나온 줄기와 꽃은 다른 모양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제가 좋아하는 화가 이우환의 예술세계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늘 같은 일을 반복하는 듯하면서도 일이 벌어지는 순간의 생각이나 상황, 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차이성’이야말로 예술의 주체이며 삶의 표현이라는 화가 이우환의 생각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음악, 그 중에서도 판소리와 산조 등의 음악이 떠올랐습니다. 무슨무슨 ‘제(制)’, 아무개 ‘류(流)’라고 하는 음악의 ‘판’을 받아들고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판 위에 같고도 다른 음악이미지를 그려내는 음악가들의 일상이야 말로 ‘동근이상’의 예술세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가변성을 내포한 동일성. 같은 것이면서도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닌 음악세계를 섭렵하며 같은 소리 길을 매번 다르게 걸어가는 음악가의 걸음을 좇는 즐거움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올 가을 내내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의 동근이상 세계를 맛보며 지냈습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손에 쥐게 된 곽수은의 김죽파류가야금산조 연주 실황 녹음을 듣기 시작해서 은행나무 가로수 잎이 노랗게 흩날리는 깊은 가을까지 김죽파 명인의 연주를 비롯, 여러 연주가들이 그려내는 수많은 동근이상의 화폭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의 원판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김죽파 명인의 생애 자료를 다시 한번 꼼꼼히 챙겨읽으며 새로운 감동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가야금 명인 죽파(竹坡) 김난초(金蘭草 1911-1989)는 김창조-한성기로 이어진 고제(古制)의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이 새롭게 연구하고 다듬어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완성한 인물입니다. 김죽파의 음악 생애는 좀 독특합니다. 어린 시절에 천재적인 음악성이 발견되어 10대 중반까지의 풍요로운 학습기를 거쳤고, 20대 초반까지 명성을 떨치며 음악활동을 하였지만 20대 중반이후 60대까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0대 후반에 다시 세간에 나와 10년 남짓 열정적인 음악 혼을 불사르던 중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이번 가을 김죽파 명인의 음악을 들으며 특히 주목한 것은 김죽파 명인의 ‘봉인(封印)된 40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음악을 외부에 음악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일상의 풍류와 교습활동 만으로 끓어오르는 음악열정을 삭였던 시간은 마치 포도주의 숙성기간처럼 그의 음악에 색과 맛과 향을 머금게 합니다.
이 기간 동안 김죽파의 가야금산조는 풍요롭고 우아하며 투명한 음악으로 무르익습니다. 그리고 60대 후반에 새롭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음악은 마치 뒤늦게 피어난 한 떨기 봄꽃처럼 국악계를 환하게 밝히게 되지요. 김죽파 명인의 말년 10여년은 나날이 새롭고 변화무쌍한 가락이 꽃잎 터지듯 솟아나는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런 김명인의 생애를 되돌아보게 하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들으면서 연주가가 특정 유파의 산조 원판을 테크닉까지 그대로 재현 연주하는 음악에서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합니다.
저는 산조를 감상한다는 것은 한 음악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음악 속을 넘나든 공력의 ‘축적’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음악가의 연주에서 ‘시간’을 느끼고, 그 시간의 축적으로 형성된 ‘아름다움’과 ‘이상(異相)’의 이미지를 음미하는 즐거움이야 말로 산조 감상의 요건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곽수은의 김죽파류가야금산조를 들으며 수더분한 여염 부인 같은 김죽파 명인의 외모 속에 감춰진 뜨거운 음악열정, 천부적인 예술성과 자유정신으로 다듬어진 음악 혼을 읽어내고 자기화하는 시간들을 즐거이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김죽파 명인 작고하기 전, 사직동 김죽파명인 댁에서 체감한 김죽파류가야금산조의 이미지는 곽수은이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에서 새롭게 그려내는 동근이상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인은 누군가 봐 주는 사람이 있어야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는 이가 있을 때 더 아름다워지려 노력하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종종 음악가의 활동에 견주어 보곤 합니다. 남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자주 만들고, 좋아하는 청중들 앞에서 힘을 얻고, 또 청중과 교감하기 위해 더 낳은 음악을 하려 노력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의 김죽파 명인의 예에서 본 것처럼 철저하게 ‘봉인된 시간’ 속에서 무르익어 남다른 아름다움을 일구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야금 연주가 곽수은은 매일매일 무대에 서는 연주자 생활대신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며 10여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단순하게 반복되는 교육환경에 매여 음악열정은 깊이깊이 묶어둘 수밖에 없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삭이고 묵혀 온 음악열정과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이번 음반에서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올 가을 곽수은씨의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연주를 들으며 김죽파 명인의 음악 세계에 새로이 눈뜰 수 있게 된 점을 감사드립니다.
2005년 11월 8일
송 혜 진(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프로필
곽 수 은 (郭修銀)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그리고 동 대학원에서 가야금을 전공하였다. 대학 재학 중 동아콩쿨에 입상하였으며 1992년 국립국악학교 음악과 강사로 활동하다가 그 이듬해 가야금 전임교사로 임용되어 12년간 재직하였다.
FM라디오 ‘문화살롱’에서 연주 및 인터뷰를 하였고, KBS TV ‘국악한마당’등에 출연한 바 있다. 1996년 첫 번째 독주회(국립국악원 우면당)에 이어 1998년 국립국악원 화요상설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에서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전바탕을 연주하여 농현이 깊고 섬세한 김죽파 산조의 깊은 맛을 충분히 보여준 바 있다. 2000년 다섯 곡의 가야금 창작곡으로 세 번째 독주회를 갖었으며(광주문화예술회관), 2002년 독일 뮌헨 Gasteig concert hall에서 네 번째 가야금 독주회 무대를 마련하였는데 이 독주회에서 독일 작곡가 Daniel. N. Seel이 곽수은에게 헌정한 가야금 곡 “현악기를 위한 조음 Ⅲ, 1”이 초연되었다. 2005년 12월 다섯번째 독주회로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전바탕을 연주하였다(국립국악원 우면당). 음반으로는 2001년 곽수은 가야금 독주곡집Ⅰ[바다와 산조]를 출반하였다
Berlin-America Club e.V에서 주최한 <세계 기아돕기 자선음악회>에서 가야금 독주(베를린 자유교회), 주독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주최한 <한국의 밤>에서 가야금 독주(베를린 대한민국 문화홍보원), 뮌헨 일본 총영사관에서 주최한 한·일 전통음악, 무용 축제에서 가야금 독주(뮌헨 퀸스틀러하우스), 프랑크프루트 대한민국총영사관에서 주최한 신년행사(뮌헨힐튼호텔)와 월드컵기념음악회(프랑크프루트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가야금 독주, 레겐스브룩대학교 초청 Summer Festival에서 가야금 독주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2002년 국립 국악 중·고등학교 ‘목멱악회’ 제16회 정기공연에서 가야금 독주를 하여 오랜 기간 공들여 연주해온 ‘김죽파류 산조’의 예술성을 보여준 바 있다. 2005년 10월 뮌헨 대한민국 명예영사관에서 주관한 ‘음악의 밤’에 초대되어 가야금 독주를 하였다(뮌헨 퀸스틀러하우스).
200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실기전공)에 입학한 이래, 수차례의 개인독주회(서울대학교 문화관 중강당, 음악대학 콘서트홀)및 Lecture Concert(여창가곡 우조 이수대엽에 관한 연구, 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의 추임새에 관한 소고)를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서 연주자로서의 음악적 지평과 이론적 안목을 넓혀가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추계예술대학교와 수원대학교 강사, ‘아시아 금교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사 : 김죽파, 이재숙, 김정자, 윤미용, 이효분, 박현숙, 김정숙, 김상순, 안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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