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도자료에서 :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 3호 한명순은 서도소리 입문 40년을 기념하여, 2014년 9월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음반 한명순의 서도소리-소리의 길(휴먼앤북스)을 출시했다. 한명순은 이번에 출시한 음반은 1.놀량사거리 2.서도시창과 서도좌창, 3.서도민요, 4.서도송서, 5.경기민요 등의 다섯 장이다. 한꺼번에 다섯 장 출시는 국악 성악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한명순은 국악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실력파 명창. 이 음반에는 서도소리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여 담겨있고, 특히 무녀들의 노랫가락과 고제 창부타령도 함께 담겨있어 국악 민요 애호가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이 상품은 5개의 CD와 해설책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명순의 소리의 길에 대하여]
서도소리에의 입문
한명순이 서도소리에 입문한 것은 스승 김정연(중요무형문화재 제 29호)를 만나서였다. 한명순은 1975년 9월, 당시 KBS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민요백일장이란 공개방송에 참가했다. 이 때 한명순을 눈여겨 본 사람이 바로 김정연 명창이었다. 김정연은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 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후계자가 될 만한 제목감을 찾고 있었는데, 이 방송에 찬조출연으로 나왔다가 한명순을 만난 것이다.
대회가 끝나자 김정연은 한명순에게 “나한테로 와라,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도 보내주겠다. 부모님 허락하면 내게 편지를 써라”고 명함을 주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한명순은 오빠들과 어머니와 상의했다. 친척 중에서는 청주 한씨 집안에서 어떻게 소리하는 기생이 나오냐며,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큰 오빠는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소리를 한다고 기생이냐, 요즘은 인간문화재도 되고 그런다”며 명순에게 서울로 가서 김정연의 제자가 되라고 허락했다. 한명순의 연락을 받고 김정연은 당시 귀했던 브리샤 승용차를 타고 직접 청양으로 내려왔다. 당시의 교통사정을 생각하면 머나먼 길이었는데 김정연은 그 먼 길로 직접 제자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김정연은 명순의 집에서 딱 물 한 잔 마시고 바로 봇짐을 싸게 했다. 옷 몇 가지 주섬주섬 싸고 명순은 ‘자가용’을 타고 스승을 따라나섰다.
서도소리로는 최초로 대통령상 수상
그렇게 하여 명순은 김정연의 마포구 창전동 5-134의 스승의 집으로 와서 김정연의 내제자가 되었다. 한명순은 김정연에게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렴풋이 서도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1980년 서도소리 전수장학생으로, 1986년 서도소리 이수자가 되었지만 한명순은 이때가지만 해도 소리를 평생 할지는 몰랐다. 1987년 스승 김정연이 타계하면서 한명순은 방황하기 시작한다. 스승의 큰 그늘을 그제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3년 선배 김광숙명창의 제의로 다시 서도소리로 돌아올 때까지 한명순은 고민을 거듭했다. 1993년 국악협회의 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한명순은 다시 서도소리 공부에 매진한다. 그 첫 결실은 스승이 타계하고도 12년만에 처음 찾아왔다. 1999년 1999년 ‘경기국악제’에서 서도좌창 「공명가」를 불러 서도소리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놀량사거리」로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 3호 보유자
한명순은 그 이후에도 고제 경기소리를 공부하고 메나리 가락을 익히고 하는 등 끊임없이 자신의 소리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에 그렇게 하찮게 생각했던 제도의 위력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소위 문화재 보유자가 되어야 제자도 모이고 무대도 더 열린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스승이 갈 길을 열어주었건만 그 길을 포기했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얼마간 노력한 결과 한명순은 스승과 함께 여러 번 공연했던 서도입창 「놀량사거리」로 2009년 10월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 3호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한명순은 문화재 보유자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소리의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여자들에게 경서도 소리의 전성기는 50대라고 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더 나이가 어리면 ‘소리의 맛’을 알지 못하고, 더 나이가 들면 목이 가라앉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최선의 음반을 위해
한명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소리를 남기기 위해 2013년 봄, 최선의 음반을 남기기로 작정한다. 한명순이 방황할 때 자문을 아끼지 않았던 이상균교수가 음반 작업을 도와주기로 했다. 한명순은 그 때부터 거의 매일 소주 반병 정도 하던 술도 완전히 끊고, 음반 작업에 매진한다. 그 이후 일년 반에 걸쳐 서도입창인 「놀량사거리」, 서도좌창, 서도시창, 서도민요 등을 녹음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녹음했다. 그러다가 어릴 때 죽사 김수영에게 잠깐 배우다 그만둔 서도 송서 「적벽부」와 「추풍감별곡」을 재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6절까지인 「추풍감별곡」은 음반 자료에는 4절까지만 남아 있었다. 죽사가 살아있을 때 LP판의 시간 제한 때문인지, 죽사가 음반 취입시 이미 연로해 6절까지 다 하지 못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절과 6절은 새로 작창(作唱)해야만 했다. 원래 서도 송서는 딱 정해진 가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자(唱者)의 기량에 따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복원이 가능했다. 서도 송서는 서도 목의 최고 경지에 가야 성립(成立)되는 소리였던 것이다. 한명순은 몇 달을 연습하여 「추풍감별곡」의 전곡을 녹음할 수 있었다.
「추풍감별곡」 전체 복원과 함께 한명순류 「창부타령」 선보여
한명순은 또한 고제(古制)의 「창부타령」과 함께 「본향노랫가락」과 「상산노랫가락」도 녹음한다. 한명순은 지연화와 전태용의 「창부타령」에 심취하여 그 소리를 듣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창부타령」을 완성한다. 고음에서 저음으로, 저음에서 고음으로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이 「창부타령」은 음악의 감정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 「창부타령」은 현재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본향노랫가락」과 「상산노랫가락」 역시 전수하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하다. 원래 경서도창은 서로 호환되는 것으로 문화재 제도가 생기기 이전 명창들은 양쪽을 다 불렀던 것이고, 이에 한명순도 경기소리의 진수를 후대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것이다.
2014년 9월 출시된 『한명순의 서도소리-소리의 길』 다섯 장의 음반은 지금까지 한명순 소리 인생의 총결산이다. 그것은 그렇게 후계자를 찾던 스승 김정연에 대한 보은(報恩)의 화답이면서, 50대 중반에 들어선 한명순 자신의 ‘소리의 길’에 대한 선언(宣言)이다.
소리의 길에는 고속도로도 없고 승강기도 없다. 험난한 비포장길과 산길을 에둘러야 한다. 삶의 굴곡과 주변살이의 신산고초(辛酸苦楚) 없는 소리는 맛이 없다. 한명순의 소리에는 이제야 맛이 담기기 시작했다. 화려한 30대의 카랑카랑한 청음(淸音)을 지나 삶이 담긴 소리가 이제야 나기 시작했다. 한명순의 서도소리는 이제야 ‘소리의 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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