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 내용입니다. 노재명 관장이 보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설까지 보내주었으나, 화면 제약상 실지 못하였습니다.
글: 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판소리 명창 최승희
최승희(崔承希, 본명:崔菜仙)는 1937년 2월 15일 전북 익산군 북일면(現 이리시)에서 태어나 17세 때까지 살았다.
그는 18세 때 전북 원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성악회(現 군산국악원)에서 홍정택에게 단가 <사창화류>(엇중모리), <천생아재>, <장부가>(어화청춘), <때마침 봄이로다>를 사사했고 김모씨(金某氏)에게 승무를 배웠다.
최승희는 19세 때 전주국악원에서 김동준에게 단가 <공도난이>와 심청가를 배웠고 홍정택에게는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를 토막소리로 배웠다. 또 그 무렵 최승희는 김원술한테 몇 달간 판소리 <유관순전>을 사사했다.
그리고 같은 해(19세)에 최승희는 서울 김여란 문하에 들어가서 7년간 단가 <적벽부>, <만고강산>, <천하태평가>(홍문연), <강상풍월>, <청춘가>(편시춘), <유람가>(운담풍경), 춘향가 초입부터 <신연맞이>까지 배웠고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등 영제 시조와 가곡을 배웠다.
최승희의 말에 따르면 김여란이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은 시조라고 한다. 그 까닭은 시조로 성악의 기초를 닦아서 숨 호흡 고르고 길게 내고 정음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 한다. 김여란은 그렇게 시조 지도 후 판소리 수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김여란 학원의 일일 강습 내용은 아침 9시 조회시 학원가 부르기, 시조 학습, 예의범절 익히기, 전공 배우기 순이었다고 한다. 김여란 학원가는 정승주 작사, 김여란 작곡이며 “수도국악예술학원”으로 시작되는 중모리 단가이다.
최승희의 증언에 의하면 김여란은 소리를 하는 일이 드물었고 제자들에게 소리를 잘 가르치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최승희는 19세부터 7년간 김여란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춘향가 한바탕도 다 뗄 수가 없었고 초입부터 <신연맞이>까지 간신히 배울 수 있었다 한다.
김여란은 만년에 공연, 방송 출연, 녹음을 무척 싫어한 탓에 녹음이 귀하다. 그래서 최승희는 김여란의 녹음이 없어서 스승 김여란 작고 후 오랫동안 김여란의 소리를 거의 들어보질 못했다고 한다.
김여란의 건강 탓도 있었지만 첫째는 국악에 대한 사회의 천시 풍조, 그리고 거기에다 김여란에게 소리를 배워간 일부 제자들이 정정렬(김여란 스승) 문하에서 배웠다고 속이는 것에 김여란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김여란은 밖으로 드러내 놓고 소리를 하거나 녹음하는 것을 꺼렸고 제자들에게도 소리를 잘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최승희와 최정희의 증언에 따르면 오래전에 김소희와 그 동생인 김경희가 보약을 지어서 김여란을 찾아와 단가 <만고강산>과 춘향가 중 <어사 행장 차리는 데>,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 등 판소리 몇 대목을 배운 바 있다고 한다. 최승희의 말에 의하면 김소희와 김경희는 동복 자매이고 김경애, 김정희는 김소희의 이복 동생들이라 하며 김여란과 김소희는 친인척이 아니라고 한다.
최승희는 27세 때 김여란 문하에서 나와 박초월에게서 1년간 단가 <철인가>와 수궁가 초입부터 <사람의 손 내력>까지 배웠고 28세 때에는 다시 김여란 문하로 들어가서 춘향가 중에서 배우지 못했던 <신연맞이> 이후부터 끝대목까지 두 달 동안 녹음을 하며 배웠고 김여란이 작고할 때까지 춘향가를 재수(再修)하였다.
최승희는 김여란이 사설을 불러주면 받아 적어가며 소리를 배웠고 <신연맞이> 이후 대목을 배울 때는 김여란이 연로했고 건강이 무척 안좋을 때라 빨리 배우기 위해 최승희가 녹음을 했는데 그때 녹음해 놓은 테입은 현재 최승희가 분실하고 없다 한다.(1995.2.17. 최승희 증언)
정정렬-김여란-최승희 계열의 수업 방식은 까다로우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한대목이라도 제대로 습득이 안되면 몇 년씩 반복 학습을 하였고 그리하여 어렵게 여기던 대목을 완전히 터득하고 나면 판소리의 원리를 깨우치게 되고 나중에 다른 대목들은 비교적 쉽게 익힐 수 있게 된다. 최승희의 경우에 춘향가 절반을 7년 동안 익히면서 원리를 터득하여 나머지 절반은 2개월만에 섭렵할 수 있었다.
최정희의 증언에 따르면 스승 김여란이 아무리 설명해도 제자가 제 성음을 내지 못하면 가야금을 연주하여 ‘바로 이 음이다’ 하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최승희는 잠시 김여란 곁을 떠난 적도 있으나 무척 오랫동안 묵묵히 김여란을 모시고 가정일까지 돌봐 드리면서 스승의 언행과 판소리를 이심전심으로 배웠다. 그리하여 그는 김여란의 소리제를 제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고 진짜 명창이 될 수 있었다.
1979년 최승희는 김명환에게서 심청가(강산제)를, 한농선에게서 흥보가(박록주제)를 배웠다. 이때 김명환에게 배운 심청가는 1988년 5월 28일 국립중앙극장에서, 한농선에게 배운 흥보가는 1992년 4월 24일에 국립중앙극장에서 완창 발표하였다.
근래에 최승희는 박봉술제 적벽가를 공부하고 있다. 박봉술 문하에서 적벽가를 배운 김동준과 이성근의 적벽가 녹음을 들으며 공부하는 동시에 이성근의 지도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최승희의 춘향가는 김여란 문하에서 배운 정정렬제이고 심청가는 김명환에게서 배운 강산제, 적벽가는 이성근에게서 배운 박봉술제, 수궁가는 박초월에게서 배운 정광수제, 흥보가는 한농선에게서 배운 박록주제이다.
이 가운데 최승희의 장기는 김여란 문하에서 닦은 춘향가이며 이로서 최승희는 1992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최승희는 1979년 10월 21일 한국국악협회 주최로 열린 서울 판소리경연대회에서 장원하였고 1980년 5월 22일에는 남원 춘향제 판소리 부문에서 장원하였으며 1981년 6월 8일에는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부문에서 장원하였다.
그리고 최승희는 1982년 10월 일본 동경, 나고야 초청 순회 공연을 가졌고 1984년 4월 27일에는 국립중앙극장에서 춘향가 완창 공연을 하였다. 1985년 4월 27일에는 국립중앙극장에서 춘향가 완창 공연을 하였다. 최승희는 이 가운데 1984년 국립중앙극장 춘향가 완창시 목이 잘 나왔다고 한다.
최승희는 19세부터 30여년 동안 서울에서 활동했으며 지금은 전주에서 살고 있다. 그는 1985년 전북 부안국악원 강사로 있다가 같은 해에 전주우석대 국악과 강사로 가서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 이후에는 전북도립국악원 판소리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북대 국악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최승희는 최정희, 지성자, 김행초, 소주호, 모보경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보경은 최승희의 장녀로서 모친인 최승희에게 판소리를 학습한 것 외에도 고등학교 때 김월하한테 시조를, 정권진에게 심청가를 사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최승희의 둘째딸도 모친인 최승희한테 판소리 학습 중이며 최승희의 막내딸은 김해숙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운 바 있다.
1960년대에 최승희에게 방송 섭외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김여란은 “최승희는 소리 들을 만하려면 아직 멀었다. 방송 출연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방송국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최승희는 스승이 원망스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러자 김여란이 최승희를 불러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소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대중 앞에 나타나면 큰 인기를 끌 수 없고 방송 출연같은 것이 소리 공부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조금씩 소리를 인정받기 보다는 소리를 완성한 다음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명창 소리를 듣도록 하여라.”
그 당시 최승희는 스승을 무척 원망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암튼 그렇게 되어 최승희는 스승의 분부대로 오랫동안 판소리 공부에 힘쓰다가 40대 초반이 돼서야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김여란의 말처럼 혜성과 같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나이든 신인이 느닷없이 튀어 나오자 귀명창들은 참말로 그의 소리를 환장하고 들었다.
정정렬과 그의 수제자 김여란은 춘향가 완창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 정정렬의 수제자 가운데 이기권은 녹음을 전혀 남기지 못했고 박록주가 정정렬한테 배운 춘향가를 전바탕은 아니지만 비교적 많이 남겼다.(1963년 녹음 KBS 소장 테입 5845-00241~00250, 1973년 녹음 아세아레코드 ALC-1781~1784 외: 박록주 춘향가 초입~어사와 장모 등)
박록주의 정정렬제 춘향가는 박록주의 제자들이 주로 그 토막소리만 익혔고 전부 배운 사람은 없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오직 김여란의 수제자 최승희의 녹음을 통해서 정정렬제 춘향가 완창을 감상할 수 있다.
녹음으로 남아있는 정정렬제 춘향가 가운데 김여란의 소리는 많이 여성화된 경우이고 박록주의 소리는 정정렬 성음에 가까운 남성적인 발성을 보인다. 이 정정렬제 춘향가 소리 진행 속도의 경우 김여란보다 박록주가 대체로 빠른 편인데 이 역시 김여란보다 박록주가 정정렬이 구사하는 소리 속도에 가깝다.
김여란도 젊어서 녹음한 몇가지 유성기음반의 경우에는 소리 진행 속도가 정정렬의 소리에 가까웠으나 말년으로 갈수록 그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박록주는 젊은 시절의 유성기음반과 중년 이후 녹음 모두 정정렬제 춘향가의 소리 진행 속도에 있어 별반 차이가 없고 일관되게 비교적 빠르게, 정정렬의 소리 진행 속도에 가깝게 불렀다.
김여란-최승희의 경우는 정정렬의 녹음과 비교해 보면 정교한 붙임새와 미세한 음색의 변화 기교 등에서 정정렬의 소리와 많이 닮았다.
김여란은 최승희, 최정희, 박초선, 정금란, 이규호, 최영옥, 김소희, 김경희, 장영찬, 조순애, 김금희, 전덕순에게 정정렬제 판소리를 가르쳤다. 현재 정정렬의 소리제를 가장 온전하게 부르고 있는 이는 김여란의 제자 최승희다.
김여란은 최승희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정정렬 선생님은 제자에 따라, 용도에 따라 연극 소리와 판소리를 구별하여 가르쳤고 또 판소리는 성별에 따라 여자 소리와 남자 소리를 가르쳐 주었다. 정정렬 선생님은 미남이었으며 음이 고르고 또 발림과 작곡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목이 궂은 편이었다.”
김여란은 최승희에게 이런 말도 했다 한다. “판소리는 성악으로서의 측면이 강하다. 아니리가 너무 길면 좋지 못하다. 발림도 너무 많이 구사할 필요는 없다. 정정렬 선생님이 짠 춘향가에 필요 이상으로 아니리가 많이 들어있다. 판소리 공연 시간이 너무 길게 소요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김여란은 최승희에게 춘향가를 가르칠 때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아니리 몇 대목을 지적해 주면서 빼고 부르라 했다 한다. 그리하여 현재 최승희가 부르는 정정렬제 춘향가는 5시간 35분 가량 된다고 한다.
이번에 출반된 본 음반은 최승희의 유일한 판소리 독집이다. 그는 지금까지 방송과 공연을 통해서 여러가지 녹음을 남겼지만 여기에 수록된 녹음이 가장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가 가장 장기로 삼고 있는 정정렬제 춘향가인데다 그의 전성기 때 녹음이다.
최승희의 증언에 따르면 본 녹음집은 1982년에 이틀간 녹음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녹음을 행한 KBS-FM 방송국 기록에 의하면 1980년 5월에 녹음되었다고 한다. 본 녹음은 당시 KBS 라디오 국악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였던 백대웅의 주선으로 성사되었다고 한다.
최승희는 장단 붙임을 다채롭고 기묘하게 구사하여 웬만한 고수들은 진땀을 흘리곤 하는데 그래서 그는 ‘고수 킬러’라는 별호까지 가지고 있다. 이 음반에서는 김명환이 ‘명고’라는 칭호에 걸맞게 장중하고 정대한 가락으로 최승희의 복잡한 붙임새 속을 유유히 누비고 있다. 추임새도 기가 막히다.
이 녹음집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고생하고 있던 최승희를 돕기 위해 1982년 일산(一山) 김명환(金命煥)의 예술을 아끼는 이들의 모임인 일산회(一山會)에서 카세트테입으로 만들기도 했다.(지구레코드사 제조, 비공식 한정판 6MC) 일산회 회원들이 이 녹음집을 한정판으로 제작하여 나누어 갖고 돈을 거두어 최승희를 도왔다.
이 녹음집은 이후 최승희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1994년과 1995년에 각각 100세트 한정판으로 최승희가 다시 자비 출반하여 제자들의 교재로 쓰고 있다.(에버그린음반회사 제조, 비공식 한정판 6MC)
그리고 1990년에는 뿌리깊은나무출판사에서 제작한 판소리 다섯바탕 전집 장시간음반에 수록되기도 했다.(성음 제조, 비공식 비매품 한정판 6LP) 그 가운데 <옥중가>와 <몽중가> 녹음은 ‘판소리의 눈’ 음반(뿌리깊은나무출판사 CDO-0010, 신나라레코드 CDD-013, 1CD)에 들어있기도 하다.
최승희는 춘향가 가운데 <신연맞이>, <옥중가>, <몽중가>, <옥중상봉>에 가장 자신이 있고 즐겨 부른다고 한다.
최승희는 김명환에게 판소리 고법을 익힌 바 있다. 그리고 최승희는 1990년 무렵에 부안 명소를 단가로 노래하는 <변산 찬가>(김형주 작사)를 중모리에 평조, 우조로 작곡한 바 있다.
최승희는 판소리 외에 <장흥 고소리>를 할 줄 알고 1990년대부터 강진의 ‘춘도 언니’ 권유로 전라도 상여소리도 가끔 부른다고 한다.
최승희는 성악 외에 기악 학습에도 관심을 보여 20여세 때 서울 종로4가 원남동 김여란 학원(수도국악예술학원)에서 김삼태에게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사사했고 서공철한테 가야금풍류 48장, 가야금 긴산조와 짧은산조 한바탕씩, 가야금병창 단가 <공도난이>와 <어화청춘>을 사사하기도 했다. 최승희가 느끼기에는 서공철 산조보다 김삼태의 산조 가락이 더 좋았다고 한다.
최승희의 증언에 따르면 김여란과 김명환은 공히 춘향가 중에서 “아무덴 줄 바이 몰라” 같이 중모리를 길게 늘려 가지고 나가는 것을 삼공잽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는 소리 진행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흡사 진양조와 비슷하여 더러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그래서 최승희가 전주대사습 판소리대회에서 장원할 때 고수 김동준이 “아무덴 줄 바이 몰라” 하는 중모리 대목을 진양조로 계속 쳐서 박이 삐었다고 한다.
최승희의 말에 따르면 판소리에는 우조, 계면조, 경조, 호령조가 있는데 우조는 “천붕우출이라 허였으니 솟아날 궁기가 있느니라” 부분처럼 강직하게 들고 가는 소리이고 계면조는 슬픈 곡조라고 한다. 권삼득 덜렁제 역시 들고 나가는 소리라고 최승희는 말한다.
평조는 평평하게 하는 것이고 경드름은 춘향가 중 <이별가>에서 “오냐 춘향아 우지 마라” 하는 소리, 호령조는 춘향가 중 <십장가>에 있다고 한다.
호걸제는 적벽가 중에서 오림 관운장 나오는 대목에서처럼 계면 없이 크게 질러서 내는 것, 마치 대장부 칼 휘두르듯이 소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봉황조는 좋아하는 사람끼리 속삭이듯이 하는 소리로서 <사랑가> 중에서 “이얘 춘향아 이리 오너라” 하는 부분에 쓰인다고 한다.
또 목성음에는 철성, 양성, 수리성이 있는데 철성은 쨍쨍하고 강철같은 목소리이며 양성은 상청이 잘 나고 깨끗하고 호짓게 나오는 목소리이며 수리성은 탁하고 근성있는 목소리인데 소리꾼은 수리성을 지녀서 소리를 하면 좋다고 한다. 정정렬의 성음이 수리성이라 한다.
소리목에는 방울목, 고자목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방울목은 둥그렇게 떠내는 목이며 고자목은 목구성 없이 땍땍 나오는 목으로서 소리하기에 안좋은 목이라 한다.
최승희가 옛 명창들에게서 들어본 말로는 “이면에 맞다 안맞다”, “소리의 간지(한배)를 잘 안다”, “졸라 뗀다” 등이고 교대죽이라는 말은 못들어 봤다고 한다.
김명환과 송영주가 이면 주장 가지고 말 다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심청가 중 <범피중류>의 초입 붙임새를 최승희는 ‘늘붙임’이라고 말한다. 엇붙임의 반대말은 대마디 대장단이라고 한다.(2000.12.22. 최승희 증언)
최승희의 스승 김여란
김여란의 녹음은 무척 드물다. 그는 1935년 일본 빅타음반회사 전속 명창으로 유성기음반을 취입했다. 1968년에는 지구레코드의 김연수 도창 창극 춘향전 음반(5LP)에 몇 대목을 녹음했고 같은해 지구레코드(케네디레코드)에서 제작된 단가집 음반에 그의 단가 2곡이 들어있다. 그리고 1993년 서울음반에서 김여란의 유성기음반 녹음을 일부 복각했고 1995년 명인기획에서 김여란의 춘향가 음반을 냈다. 그밖에 김여란의 공연 실황 등이 녹음된 테입자료 몇가지가 남아있다.
김여란은 누구인가. 정정렬의 소리제를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준 명창이다. 김여란도 스승처럼 춘향가에 능했고, 춘향가로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그런데 함께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은 박록주, 김연수, 정광수, 박초월, 김소희는 각각 지정된 판소리의 완창 녹음을 남겼으나 김여란만 지정받은 춘향가의 완창 녹음을 남기지 않았다. 1983년까지 생존해 있었는데도 말이다. 김여란을 아끼는 판소리 애호가들에게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김여란은 소리란 부르면 부를수록 어렵게 느껴진다며, “소리란 철없을 때 하는 것이지 알고 나면 못한다”고 했다. 그가 1935년 유성기음반에 남긴 그의 철없을 때 소리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감동적인 데가 있다.
미리 계획된 소리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소리라고나 할까. 힘 안들이고 여유있게 부르는데 듣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슬픈 장면도 무조건 우는 쪽으로 몰지 않고 차분하게 부르기 시작하여 어느 순간 그 상황을 자신의 입장처럼 마음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감정으로 잔잔하게 표출하는 식이다.
김여란의 1935년 녹음은 당시 대명창의 탄생을 예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40년에 출판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김여란의 이름이 보인다.
판소리 사전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창극사에 소개된 89명의 판소리 명창 가운데 김여란은 89번째 마지막으로 소개되었다. 일제 때 가장 유망한 판소리의 꿈나무 중에 하나로 꼽혔던 것이다. 그 후 김여란이 판소리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으니 귀명창 정노식의 예언은 정확하게 적중한 셈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253~254쪽)에서 김여란의 소리를 일러 다음과 같이 간단 명료하게 적절히 평해 놓았다. “비교적 아니리를 잘하고 스승(정정렬)의 창법을 답습함인지 붙임새도 제법 능하다. 무대에 서면 다소 서투른 감이 있으나 방안소리로는 썩 조직적으로 재미있게 하는 편이다. 춘향가에 가장 장한 점이 있다.”
1935년 김여란의 유성기음반에 담긴 춘향가 중 <신연맞이>와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는 모두 김여란의 장기였다. <신연맞이>의 자진모리 부분에서 들려주는 환상적인 붙임새는 그의 충실한 학습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 녹음은 탁월한 이면 표출과 맑은 성음이 돋보인다. 김소희가 김여란 문하에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를 학습하여 장기로 삼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겠다.
김여란(金如蘭, 본명:김분칠)은 1907년 4월 4일 전북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에서 부친 김성록과 모친 김사포 사이의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김여란은 어려서부터 대단한 음악적 재질을 보여서 그의 부친은 일찍부터 그에게 음악교육을 시켰다. 김여란은 6세 무렵부터 국악에 입문하여 조홍련에게 <육자배기>를 배웠고 김비취에게 가곡, 가사, 시조, 아쟁, 가야금 등을 배웠다.
김여란의 나이 9세 되던 어느날 익산의 성림사라는 절을 놀러갔다가 그 곳에서 가곡을 불렀고 그 지방 한 부호의 아들이 듣게 되었다. 즉석에서 김여란은 돈으로 흥정되어 그로부터 2년 뒤에 그의 신부가 되었다. 머리보다도 더 큰 쪽을 찌고 이마를 뜯어 곤지를 찍고 분홍치마에 까치동 호장저고리를 입혀 김여란을 신부로 만들었지만 어린 김여란은 그런 화려한 옷차림이 처음인지라 천진난만하게 마을에 자랑하고 다녔다. 부자집 아들은 그렇게 머리만을 얹어 놓고 신행은 6년 후에 하기로 했다.
신랑은 가끔 처가에 들러 아내가 자라는 것을 보며 흐뭇해 했고 어린 김여란은 남편이 집으로 찾아와도 남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부모님을 찾아온 손님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김여란의 나이 16세가 되자 그런 내력을 알게 되었고 1년 후에 있을 신행길을 모면하기 위해 도망을 결심하고 친구의 외숙모를 따라 일본으로 도망갔다.
일본에서 그는 공장 일을 하다가 2년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부친은 사업에 실패하여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모친과 어린 동생은 이웃집 행랑채 한 칸을 빌어 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고 결국은 정읍의 한 권번을 찾아갔다.
김여란은 그 권번에서 판소리 5명창으로 꼽히던 정정렬에게 꼬박 1년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 정정렬에게 더 많이 배우고 싶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에게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후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다가 한남권번에 기적을 올려 놓고 요정에 나가기 시작했다. 한남권번에는 마침 정정렬이 소리 선생으로 있어 객고를 덜어주었고 요정의 소개도 수월히 받게 되었다.
그는 품행이 바르고 피부 빛깔이 희고 눈이 크며 큰 키에 몸매가 좋았고 일본 바람도 쐰 터이라 외모가 뛰어났다. 음악 실력에다 반듯한 인품, 수려한 외모를 겸비하여 공연장뿐 아니라 명월관 등의 요리집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한참 명성을 날릴 때는 패물이 장안에서 꼽힐 정도로 많았다 한다.(최승희 증언)
그런데 김여란은 가곡, 가사, 시조 실력은 좋았으나 판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판소리가 아니면 행세를 못했다. 그래서 김여란은 판소리 실력을 갖춘 김초향, 박록주, 신금홍에게는 밀려났고 판소리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20세 때의 어느날 김여란의 가곡, 가사, 시조를 좋아하여 요정에 즐겨 찾아오던 장 모라는 부호가 김여란의 판소리에 대한 고민을 듣고서 딱하게 여겨 판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후원금을 내주었다.
장 모의 도움으로 김여란은 20세 되던 가을 정정렬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경북 영천에 있는 은혜사로 가서 100일 동안, 계룡산 갑사로 옮겨 200일 동안, 이어서 금강산에 들어가 2~3년 동안 판소리를 공부했다. 그리고 김여란은 김봉이(김창환 아들)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운 바 있다.
최승희의 증언에 따르면 김여란은 스승 정정렬을 모시고 강원도 금강산에 들어가 약 3년 동안, 계룡산 갑사에 들어가 약 1년 동안 단가 <적벽부>, 춘향가, 심청가, 숙영낭자전 등을 배웠다 한다. 최승희는 김여란이 흥보가 하는 것을 목격한 바 있으나 누구 바디인지는 김여란한테 물어보지 못했다 한다.
1929년 대구극장에서 ‘명창 김여란 판소리 발표회’가 있었다. 이 때 김창환, 정정렬 두 대명창이 찬조 출연하였으며 김여란은 이 데뷔 무대에서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세 바탕을 연창하였다. 이는 당시 판소리계에 큰 화제가 되었고 그 후 김여란은 명창으로 급부상하였으며 이후 라디오 방송, 공연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리고 김여란은 성공 후 자신을 도와준 장 모라는 부호를 정성껏 받들었고 장 모의 가족을 부양했다.
최승희의 말에 따르면 김여란은 젊어서 부민관, 동양극장 공연을 비롯하여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 순회 공연을 한 바 있다 한다.
20세의 늦은 나이에 판소리 명창의 길을 택한 김여란이 김초향, 박록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입산하여 약 3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고 정정렬을 독선생으로 모시며 밀도있는 공부를 했고 피나는 수련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정렬이 고대 판소리를 근대적 취향의 소리로 바꿔 불러 크게 성공하자 수많은 소리꾼들이 정정렬제를 배웠으나 김여란이 정정렬제를 가장 온전히 물려받은 이로 꼽힌다. 김여란은 일제 때나 광복 후에도 창극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고 판소리를 고집하였다.
김여란은 일본인을 무척 싫어하여 소리판에 일본인이 한 사람만 보여도 소리하기를 꺼려했다 한다. 때문에 일본인들의 눈에 거슬려 소리판에 오래 있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늘 주변에 구름떼 같이 끼어드는 한량들에 대한 환멸도 생겼다. 그래서 김여란은 194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 동안 소리를 그만두고 경남 밀양에서 묻혀 지냈고 그를 아끼는 많은 소리꾼과 귀명창들은 그가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김여란은 1950년대 초반에 다시 소리판으로 돌아와 임방울, 박록주, 김소희, 박초월, 박귀희 등과 활동하면서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고 국악예술학교 2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재직하였다.
김여란은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는데 김여란의 오빠 아들인 김갑수를 아들로 삼았고 김갑수는 김여란을 어머니로 모셨다. 김여란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몸이 상해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김갑수의 부모는 1960년대 후반에 작고하였다.
김갑수의 본명은 김영숙인데 여자 이름이라서 집에서는 김갑수라 했다 한다. 현재 김갑수가 김여란의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김갑수는 김여란의 얼굴과 많이 닮았다. 김여란의 여동생 아들은 공군 대령으로 복무한 바 있는 신학재인데 신학재가 김여란의 소리를 많이 녹음해 놓았고 사진도 찍어 놓았다 한다.
6.25 나기 전에 김여란은 정승주와 재혼하여 진주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956년경 진주에서 살고 있던 김여란이 김갑수에게 서울 주소를 알려주며 서울로 갔다. 김갑수가 얼마 후 서울로 가보니 김여란이 수도국악예술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있었다 한다.
그 후 수도국악예술학원은 날로 번창하여 1960년대에는 수강생이 70~80명 가량 되었다 한다. 수도국악예술학원은 노인반, 남자반, 여자반, 학생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강사로는 판소리와 시조에 김여란, 거문고에 신쾌동, 가야금에 서공철, 무용에 이소애가 있었다.
김여란은 1956년에 설립된 여성국악동호회의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한 바 있다. 여성국악동호회에는 김소희, 박초월, 박귀희, 성금연, 한영숙이 강사로 활동하였고 장영찬, 조통달이 이 동호회의 학생이었다.
김갑수는 국악에 흥미가 있어 공부해 보고 싶었으나 김여란의 반대가 강했다. 김갑수가 어쩌다 가야금이라도 만지는 것을 보면 김여란은 회초리를 들었다 한다. 김여란은 부모 없고 갈 곳 없는 불쌍한 아이가 있으면 남이라도 데려다 키울 만큼 인정이 많았다.
그리고 김여란 주위에는 늘 국악인들이 모여 들었다. 국악인 중에 김여란 신세 안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여란이 후덕하게 대하였기 때문이다.
4.19 난리통에 갈 곳이 없어 곤경에 처하게 된 박록주를 반갑게 맞아준 것도 김여란이었다. 또 노량진에 있던 김여란의 셋방살이 집에는 임춘앵 남매, 김명환이 방 한칸을 얻어 생활한 바 있다.
김여란과 박록주(1904~1979)는 언니, 동생 하며 사이가 무척 좋았다 한다. 그리고 김여란은 김명환의 북 솜씨를 인정하여 만년에 김명환의 북반주에 맞춰 주로 소리를 하였고 김명환이 북반주를 해야 소리할 맛이 난다고 하였다.
김여란은 여러 사람에게 인정있게 대한 만큼 1966년에 있었던 회갑연 때는 많은 국악인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고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다 한다.(1995.2.22. 김갑수 증언)
김여란은 정정렬의 소리를 이은 만큼 아니리가 깔끔하고 붙임새가 탁월하다. 그러나 발림을 많이 구사했던 정정렬과는 상반되게 김여란은 발림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양한 붙임새 위에 사설을 아기자기하게 얹어 나가는 그의 소리는 신중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박을 놓지기 쉽다. 그리고 소박함과 매서운 서슬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듣는 이의 추임새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김여란은 아니리도 돋보이는데 정정렬의 아니리와 거의 비슷한 맛을 낸다. 토막소리만 몇 대목 배우게 되면 아니리는 스승처럼 맛을 내기가 힘든데 김여란은 정정렬에게 오랫동안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아니리 또한 제 맛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김여란은 단가, 춘향가, 심청가, 숙영낭자전을 두루 잘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단가 <적벽부>, <만고강산>, <천하태평가>, 춘향가 중 <이별가>, <옥중가>를 장기로 삼아 즐겨 불렀다. 그리고 판소리뿐 아니라 춤에도 능했다.
또 김여란은 판소리 명창으로서는 드물게 가곡, 가사, 시조를 잘했다. 어려서 가곡, 가사, 시조를 배워둔 덕택에 판소리를 부를 때 <변사또 생일 잔치에서 어사또가 지은 글 읽는 데>와 같은 시창 성음이 나오는 대목을 능숙하게 하였다. 다른 명창이 지니지 못했던 김여란만의 특기였다.
김여란은 불교 신자였다. 김여란은 만년에 도봉산에 있는 천축사, 망월사를 다녔다. 조상현이 김여란의 장례식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1990년경에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김여란 추모 공연이 있었다.
최승희의 증언에 의하면 김여란은 성격이 매우 밝고 인자했고 늘 겸손함을 잃지 않았으며 은혜를 입으면 꼭 갚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여란은 만년에 무대에 서면 “저는 늙어서 소리 맛이 없으니 꽃같이 젊은이들 소리 많이 감상하십시요. 저는 마당이나 쓸고 들어가겠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대개는 단가와 토막소리 한 대목 정도 부르고 들어갔다 한다.(이보형 증언)
1980년 무렵 김여란이 중풍으로 쓸어졌다. 최승희가 그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급히 약을 지어 달려가 보니 스승 김여란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약을 복용하고 난 후에야 간신히 말을 더듬더듬 하기 시작했다 한다. 김여란은 극심한 경제고 속에서 생활하다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후에는 고통이 더 가중되어 고생이 많았다. 1983년 5월 3일 김여란은 숨을 거두었고 벽제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가 되었다.
정정렬제 판소리 춘향가
일제 때를 전후하여 대형 극장이 출현하고 선교사들에 의해 유입된 서양 문화, 신파극, 왜색 가요가 유행하자 판소리 명창들도 그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서 새로운 변화의 몸짓을 시도하였다. 중국의 경극을 모방해서 판소리를 창극으로 각색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서편 양대산맥의 중심이었던 송만갑과 정정렬이 급변하는 시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소리제의 개발을 주도했다.
송만갑은 동편제에 서편제 맛을 가미하여 혁명을 일으켰고 정정렬은 새로운 서편제를 내놓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중고제와 옛 동편제, 옛 서편제는 인기를 잃었고 배우려 하는 이가 드물게 되어 전승이 거의 끊어졌으며 송만갑제와 정정렬제는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인기 정상의 유파로 자리잡았다.
정정렬의 경우에는 성음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해서 옛 소리제를 유창하게 부르기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목에 맞게 소리를 새로 짜서 불렀던 것이다. 특히 정정렬이 새로 짠 춘향가는 큰 인기를 끌어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송만갑의 동편제 춘향가는 대체로 아니리가 간략하고 상황 묘사가 압축되어 있어서 장면 전환이 빠르며 박진감이 있는 반면에, 정정렬의 서편제 춘향가는 아니리가 길고 각 대목의 상황이 여러 각도로 오밀조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그리고 정정렬이 새로 개발한 신(新) 서편제는 김창환의 고(古) 서편제보다 기교가 화려하며 현대 감각에 맞는 세련된 점이 많다.
영화 서편제가 크게 흥행하여 이제 국악 하면 서편제를 떠올릴 만큼 서편제라는 말은 널리 보편화 되었다.
서편제는 박유전이 개발한 소리제로 알려져 있는데 박유전의 소리는 이날치, 정재근, 박창섭에게 전해졌다. 이날치는 이창윤, 강용환, 김채만, 정정렬 등을 가르쳤고 정재근은 정응민을 가르쳤으며 박창섭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다. 이창윤과 강용환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고 김채만은 공창식, 박종원, 박동실, 성원목을 가르쳤다. 정응민은 박기채, 김준섭, 성우향, 정권진, 조상현 등을 가르쳤고 박동실은 김소희, 한애순, 한승호, 김록주, 장월중선 등을 가르쳤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동편제와 서편제는 각각 송흥록과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한다 하였다. 그런데 동편제 명창이라고 다 송흥록 계열이 아니고 서편제 명창이라고 다 박유전 계열이 아니다. 동편제 명창 가운데 김세종, 정춘풍이 송흥록 계열과 다른 전승 계보에 속하는 명창이다.
그리고 서편제 명창 가운데 정창업은 박유전 계열이 아닌 다른 전승 계보에 속하는 명창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창극사에는 정창업의 스승이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자가(自家) 특색으로’ 소리를 했다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정창업은 가문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소리를 집안 어른 밑에서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정창업의 소리는 정학진, 김정길, 김창환, 정정렬에게 전해졌다. 정학진과 김정길의 소리는 전승이 끊어졌고 김창환의 소리는 김봉학, 오수암, 조몽실, 정광수, 강장원, 임옥돌, 강남중, 박지홍, 성원목, 임기창, 백성환, 박록주, 김죽파 등에게 전해졌다.
정정렬은 일제 때 활동한 대부분의 여류 명창을 가르쳤다. 정정렬 문하에서 판소리를 공부한 대표적인 명창으로는 김여란, 이기권, 조상선, 김초향, 김연수, 김소향, 박록주, 김소희, 박동진을 꼽을 수 있다.
한편 김거복, 김수영, 백근용, 최승학, 한경석과 같은 이들은 서편제 명창으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전승 계통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 가운데 최승학은 김정근 문하에서 중고제 소리도 배운 바 있다.(1930.11.26.매일신보) 그리고 일제 때 40대 정도의 나이로 다이헤이 음반회사에서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전일도 또한 서편제 명창인데 전승 계보가 불분명하다.
송만갑이 가문의 동편제 소리에 서편제 맛을 가미하여 소리를 변질시켰다가 집에서 쫓겨난 일화는 유명하다. 최승학의 경우에는 처음에 김정근 문하에서 중고제를 배웠다가 나중에 서편제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도 여러 명창들이 고제 소리를 하다가 나중에 신제 소리를 따랐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옛 소리는 도태되고 자꾸 새로운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신식 소리를 따르지 않으면 외면당했을 것이다.
송만갑이 전통적인 동편제 소리를 변질시키고 통속화된 소리를 부르자 박기홍은 송만갑에게 ‘장타령 아니면 염불’이라 했고 ‘패려자손’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또 그 후대에 임방울이 단가를 계면조로 부르자 귀명창들은 이제 판소리는 끝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통속화된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러고 보면 모든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극적으로 변하는 것인지 모른다.
서편제는 여러 판소리 유파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생긴 소리제이다. 그래서 여러 유파 가운데 가장 세련된 면이 있고 여러가지 다양한 기교가 쓰인다.
구한말에 가장 세련된 소리 가운데 하나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김창환의 소리는 1930년대에 정정렬의 소리에 밀려났다. 이제는 일제 말기에 가장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던 정정렬의 소리도 차츰 고제 대접을 받고 있다. 요즘 소리가 많이 통속화 돼서 이제 김창환과 정정렬의 서편제 소리는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김창환의 고 서편제 소리는 그 나름대로 고박한 맛이 있고 판소리 융성기 최후에 꽃피운 정정렬의 신 서편제는 특유의 세련된 맛이 있다. 김창환은 고(古) 서편제 명창이고 정정렬은 고 서편제에 좀더 화려한 기교를 가미하여 신(新) 서편제를 내놓은 명창이다. 나이로 보면 김창환이 정정렬보다 24세 가량 연상이다. 두 명창의 판소리 차이는 그 나이 차이 만큼이다. 즉, 시대 변천에 따른 대중의 기호 변화에서 비롯된 차이라 하겠다.
김창환(金昌煥, 1852?~1938?)은 전남 나주군 삼도면(現 광주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편제 명창 이날치와 이종간이고 동편제 명창 박기홍과도 이종간이라 하며 명창 임방울의 외숙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니 김창환의 음악 재질은 집안의 피내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김창환이 장기로 한 소리는 단가 <고고천변>, 춘향가, 흥보가, 남도민요 <농부가>이다. 그리고 김창환에 대한 옛 문헌 기록이나 명창들의 증언을 접하다 보면 가장 많이 강조되는 점은 발림(연기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이다.
김창환과 교류했던 박록주, 정광수 등 여러 명창들은 그의 발림을 가리켜서 “많이 꾸미지 않아도 신명이 나며 익살스러우면서도 되바라지지 않고 가벼운 몸짓에도 무거운 맛이 있고 손 하나를 들어도 깊은 멋이 있었다” 한다. 이렇듯 그는 뛰어난 소리 기량에다 탁월한 연기력까지 겸비했기 때문에 초기 창극 무대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겠다.
김창환을 비롯한 판소리 5명창은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의 본 모습을 많이 간직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5명창의 음반은 각 유파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녹음으로 평가된다. 그 중에서도 김창환은 고(古) 서편제, 김창룡은 중고제의 특성을 많이 보유한 명창들이기 때문에 각 유파의 특징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 된다.
김창환은 옛 서편제를 구사한 만큼 요즘 소리와 비교해 보면 같은 서편제라 할지라도 다른 맛이 있다. 김창환의 소리는 요즘 소리보다 매우 고박하고 담백하며 품위있는 쪽으로 다듬어져 있다. 아마도 어전 광대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룬 자부심이 소리를 기품있는 쪽으로 발달시킨 중요한 요인이 됐을 것이다. 그런 김창환의 판소리를 가리켜서 그의 제자인 정광수는 “법도가 엄중하고 통이 큰 데가 있다”고 말했다.
김창환의 소리는 현재 남아있는 녹음 가운데 가장 오래 전의 서편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김창환의 녹음은 서편제가 동편제의 영향을 받아서 생성된 초기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정정렬(丁貞烈, 본명:丁明燮)은 1876년 5월 21일 전북 익산군 내촌리에서 태어나 1938년 3월 21일 낮 12시 15분 관철동 128번지 자택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장지:미아리)
정정렬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재주가 있었고 영리했으며 음악적인 재질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7세부터 정창업 문하에 들여 보내서 판소리 공부를 시켰다. 정창업(丁昌業)은 정정렬과 친인척이며 당시 한 마을에서 살았다. 정정렬은 정창업 외에 이날치 문하에서도 판소리를 배웠다.
정정렬의 아우 정원섭(丁元燮)은 판소리 고수이자 피리 연주자였고 북, 장고, 피리 반주와 남도민요 창을 유성기음반에 녹음한 바 있다.
정정렬은 16세 무렵부터 40세 무렵까지 약 25년 동안 전북 익산 신곡사, 충남 홍산 무량사, 충남 공주 갑사에서 독공을 했다.
그리고 그는 독공 중이던 28세(1903년)에 나라에서 참봉 벼슬을 받았다. 정정렬은 독공을 마친 40세 무렵에 경상도 마산으로 가서 수 년간 후진을 양성하다가 50세(1925년) 무렵에 서울로 가서 활동했다.
정정렬은 1925년 무렵에 서울서 약 1년 정도 머물러 있다가 1926년 가을부터 1929년 후반까지 금강산 등에서 김여란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정정렬은 1930년 초반이 돼서야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는 이 무렵에 조선일보사 주최로 조선극장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출연하여 서울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다. 정정렬은 이 때부터 인기를 등에 업고 무수히 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정정렬의 장기는 춘향가이며 특히 <이별가>, <신연맞이>, <옥중가>, <몽중가>, <박석티>, <어사와 장모>, <어사 출도>가 특기였다. 단가로는 <적벽부>, <불수빈>을 즐겨 불렀다. 그는 춘향가가 특기였던 만큼 춘향가를 가장 많이 녹음했다.
정정렬은 1931년에 열린 조선음률협회 제2회 공연 때부터 정정렬이 조선음률협회에서 활동하였고 그러면서 1932년에는 조선정악회를 조직한 바 있다. 1933년 조선음률협회가 해체된 후 정정렬은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과 함께 1934년 9월 5월 조선성악연구회(조선음률협회의 후신)를 조직했다. 정정렬은 조선성악연구회의 상무이사를 맡았고 그 연구회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창극 연출을 도맡았다.
옛 문헌이나 명창들은 정정렬이 탁월한 연출로 창극을 성공시켜 전통음악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의 가장 큰 공로로 꼽고 있다.
그리고 정정렬은 단가 <적벽부>, 판소리 옥루몽,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등을 짓는 등 신작 소리 작곡에도 많은 열성과 유능함을 보였다.
정정렬제는 붙임새가 복잡하고 다양해서 웬만큼 북반주에 자신이 없는 고수가 정정렬제를 반주하려고 하다가는 망신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소리꾼과 고수가 장단이 삐지 않고 맞아 떨어지기만 하면 그 이상 묘한 맛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또한 정정렬제이다. 정정렬제 춘향가 중에서 <춘향모 모르게 이도령과 춘향이 첫날밤 지내는 데>, <오리정 이별>이 특히 멋있다.
정정렬은 목이 궂었기 때문에 목구성에 있어서 방울목을 개발하여 즐겨 썼고 붙임새에 있어서 잉어걸이, 완자걸이를 특기로 많이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또 엇몰이, 엇중모리와 같은 엇박자 장단과 엇청에 능하며 목이 안좋기 때문에 느린 장단보다는 중중모리 이상의 빠른 장단에서 보다 수월하게 소리를 이끌어가는 특징이 있다.
방울목은 춘향가 중에서 <박석티>(진양조)와 같이 느린 장단의 대목에서 주로 쓰이며 빠른 장단에서는 쓰기 어려운 기법이다.
잉어걸이는 소리를 달고 엎어서 가는 것인데 합에서 소리를 딱딱 끊어서 소리를 가지고 가면 단조로우니까 앞쪽에서 길을 낸 소리를 다음 합에서 소리를 끊지 않고 겹쳐서 소리를 얹어서 가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춘향가 중 <신연맞이>에서 “키 크고, 질 잘 걷고, 맵씨 있고, 어여쁘고, 영리헌 저 급창”의 경우 ‘영리헌’은 방울목이고 ‘질 잘 걷고’가 잉어걸이다.
완자걸이는 양반처럼 점잖게 걸어 가다가 간혹 엇걸어가는 것을 말하는데 <방자가 나귀 안장을 짓는 데> 초입 부분이 완자걸이다.(최승희 증언)
정정렬은 소리 법도를 엄격하게 가르쳤고 매우 혹독하게 공부시켰다 한다. 소리를 가르치고 나면 제자를 깊은 산속에 들여보내서 독공하게 하였다 한다. 그리고 잡가는 절대 못부르게 했고 사람에 따라 표목을 달리해서 소리를 가르쳤다 한다. 이는 그 제자 김여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김여란도 제자들에게 그리 지도했다 한다.(최정희 증언)
정정렬제 판소리 명창인 최승희는 이렇게 말한다. “정정렬 선생님은 사고 방식이 매우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야기 전개 방식과 구성에 있어 획기적인 대목들이 많으며 새로운 소리제를 만들어낸 창의력이 매우 놀랍다. 춘향가 중에서 <해 소식> 같은 대목을 보더라도 정정렬 선생님은 작곡력이 매우 뛰어나서 천부적인 음악 재질을 타고난 분이라 생각된다. 정정렬 선생님은 소리 공부를 무척 많이 하여 목은 궂었으나 공력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정정렬 선생님의 소리는 바위 덩어리 쾅 던져 놓는 것 같고 임방울 명창의 소리는 조약돌 톡 던져 놓는 것 같다고 한다.”
정정렬제 판소리 명창인 최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정정렬제 판소리는 흔히들 바늘 끝으로 소리 구석구석을 파내는 것 같다고 한다. 그 만큼 기교가 다양하다는 말이고 그래서 무척 배우기가 힘들다. 그래서 잘하든, 못하든 정정렬제 춘향가 한바탕을 다 배웠다 하면 모두들 장하다고 했다.”
창작 능력이 뛰어났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정정렬이 만년에 내놓은 판소리는 그가 수 십년 동안 고대 판소리를 연구하여 얻어낸 결론이자 미래의 판소리로 제시한 결정체였다.
정정렬보다 더 기교를 쓰면 못 들을 것 같고 덜 쓰면 아쉬울 것 같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정렬 만큼이면 좋을 듯싶다. 정정렬은 가야 할 지점을 알았고 멈출 줄도 아는 명창이었다 하겠다. 즉, 정정렬은 판소리 기교의 최고치에 도달한 명창이었고 그러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말아야 할 때는 절제할 줄 아는 명창이었다고 하겠다.
허나 정정렬의 그 수많은 노력과 천부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거의 유일한 그의 단점 한가지라 할 수 있는, 목이 매우 궂은 ‘떡목’은 두고두고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성악은 역시 무엇보다 목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같은 서편제 계보의 김창환이 미성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미 있는 붙임새를 구사한 반면에 정정렬은 좋지 않은 목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엇붙임을 많이 사용하여 붙임새가 다소 인위적인 맛을 풍긴다.
사람이 장점만 두루 지니고 태어날 수 없고 인간이 완벽할 수 없기에 결함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귀명창들은 만일 정정렬이 그 전무후무한 독공 노력과 천부적인 작곡력, 환상적인 발림에 좋은 목까지 겸비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고 상상해 보곤 한다.
그러나 정정렬 역시 만일에 목을 잘 타고 났다면 소리를 그리 하지 않았을 것이고 판소리 역사 전체를 돌이켜 보더라도 목을 잘 타고 나면 재주만 믿고서 노력을 별반하지 않고 목이 좀 모자라면 불굴의 의지로 분발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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