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레서 :
김화선 명창의 단가와 판소리 최막동제 춘향가, 심청가
이보형(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국악아카이브연구회 정창관 회장이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일련의 국악음반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많지만 한편 재미있는 점도 있다. 왜냐하면 숨어 사는 명인명창들을 발굴하여 그 음악을 담아서 음반으로 담아 기록으로 남기어 후세에 연구자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는 이미 작고하거나 노쇠하여 연주가 불가능한 명인명창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이 일련의 음악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이번에는 정창관 선생이 낸 음반 시리즈에는 김화선(여막) 명창의 단가와 춘향가 및 심청가 일부가 담기었다. 이번 음반도 정창관 선생이 전남 함평에 묻혀 사는 노 명창 김화선을 찾아내어 그가 보유하고 있던 판소리를 녹음하여 음반으로 낸 것이다. 이번에 낸 김화선의 판소리 또한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이 음반이 귀하다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김화선 명창이 지방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의 판소리를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는 것이 귀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김화선이 부른 춘향가 및 심청가가 알려지지 않은 최막동제이기 때문에 귀하다는 것이다.
김화선은 1928년 함평에서 태어나 지금도 함평에 산다. 어려서부터 임춘앵, 강장완, 김수경, 최막동, 한성기와 같은 명인명창들에게 판소리를 비롯해서 승무, 산조, 민요 등 여러 가지 공연예술을 배웠다 하는데 주로 최막동에게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박탄가(흥보가)를 배웠다 한다. 이번에 나온 음반에는 그 당시에 배운 최막동제 춘향가 및 심청가 일부가 담긴 것이다. 지금도 김화선은 함평에 숨어 살며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데 정창관 선생이 함평에 찾아가 설득하여 소리를 남기게 되었다.
최막동은 일제 강점기에 소리 솜씨가 뛰어난 명창이었으나 주로 전라남도 서남지역에 살며 활동 하였던 관계로 지금은 서울에서는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대단한 명창이라는 것은 전라남도 서남지역에 가서 국악을 즐겼던 고로들의 증언을 듣게 되면 당장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음반도 없고 또 그에게 배운 제자들의 소리도 알려지지 않아서 잊혀지고 있었다. 다행히 이 음반이 잊혀진 최막동의 심청가 일부를 담아서 후세에 자료로 남게 된 것이다.
이번 음반에서 김화선이 부른 것은 단가 두 편과 최막동제 춘향가 및 심청가 일부이다. 단가는 ‘호남가’(함평천지), ‘사철가’(이산 저산) 두 편이다. 춘향가는 ‘이도령이 이별차로 춘향집 가는 대목’ ‘이별 말에 춘향과 춘향모친 실성발광하는 대목’, ‘춘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대목‘을 담았다. 심청가는 ’심청이 밥 빌러 나가는 대목‘ ~ ‘심봉사 자탄 하는 대목’을 담았다. 고수는 명창 김수미가 대부분을 담당하였다.
이 음반은 숨은 명창 김화선의 판소리 기량을 연구하는 이에게 필요할 뿐 아니라 최막동제 판소리를 연구하는 이에게도 귀한 자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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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전통춤·가야금 명인 김화선의 삶과 예술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김화선(예명)은 1928년 1월 14일(음력)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김안식(김해 김씨, 함평 태생)과 김모씨(광산 김씨, 무안 태생)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김화선의 부친은 국악을 좋아했고 누나가 한명 있었다. 김화선의 조부는 김경국으로서 농부였다.
김화선의 본명은 김여막, 옛 예명은 김해선이고 8세 때 부모를 따라 함평에서 정읍으로 이사하였으며 12세 때부터 정읍권번에서 국악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김화선의 부친이 김화선을 정읍권번에 넣었다. 김화선의 부친은 무남독녀 김화선을 무척 예뻐해서 출가 안 시키고 데리고 있는 다고 국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한다.
김화선은 14~15세 무렵에 1년간 서울 다옥정 임춘앵 집에서 임춘앵한테 한국 무용 <승무>, <살풀이춤>, 단가 <천생아재>, <편시춘>, <공도난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남도민요 <육자배기>, <흥타령>, <새타령> 등을 익혔다.
<흥타령>을 소리북으로 반주할 때는 다른 소리 반주 때처럼 북채로 북을 치는 식이 아니고 북채로 북통을 짓이겨 누르듯이 반주를 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흥타령>은 한이 있어야 제 맛을 잘 살려 부를 수 있다고 한다. 김화선이 젊었을 때 요리집 출장, 권번 오후 저녁마다 모여 앉으면 <육자배기>, <흥타령> 등의 남도민요를 많이 불렀다 한다.
임춘앵은 <긴 사랑가>를 “만첩청산~”으로 부르지 않고 “사랑 사랑~”으로 불렀다. <긴 사랑가>를 “만첩청산~”으로 부르는 건 옛날식으로서 나이 많은 명창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김화선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김화선이 임춘앵한테 국악을 학습할 당시 임춘앵은 조선권번 소속이었다. 당시 조선권번에는 판소리 사범이 없었고 요리집으로 놀음 나가는 조선권번 기생들을 태우는 인력거꾼이 조선권번에 많이 왕래하였다 한다. 임춘앵은 광주권번 동기 때부터 이름을 떨치고 반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임춘앵은 구음을 무척 잘했는데 임춘앵처럼 구음을 그렇게 잘하는 다른 사람을 김화선은 못봤다고 한다. 임춘앵은 ‘떼놈, 송장도 춤추게’ 구음을 잘했다 한다.
김화선이 임춘앵한테 배운 <승무>의 복장은 검정 고사, 흰 고깔, 적색 띠를 사용하고 반주는 삼현육각으로 염불-타령-북 놀음-느린 굿거리 순으로 진행되며 북채 넣고 빼는 부분이 요즘과 다르다고 한다. 임춘앵은 <승무> 공연시 북 하나를 놓고 쳤는데 북가락을 기가 막히게 멋있게 잘 쳤고 김화선은 바로 이 <승무> 북가락을 배우기 위해 임춘앵을 찾아간 것이라 한다. 김화선은 임춘앵한테 <승무> 북가락만 두달 동안 배웠다. 임춘앵 <승무> 공연시 북은 사람이 잡아줬고 북 크기는 판소리 북 크기 정도였다 한다.
임춘앵은 <살풀이춤> 공연시 하얀 한복을 입고 석자 내지 석자 반 정도의 긴 수건을 들고 춤을 추었고 반주는 살풀이-자진살풀이 장단이었다 한다.
임춘앵과 임유앵은 자매간이고 임유앵, 임춘앵의 모친이 김화선의 고모(김화선 부친의 누나)이다. 임유앵 형제는 총 2남 2녀인데 차례로 임유앵(여), 임모씨(남), 임천수(남), 임춘앵(여)이며 이 가운데 임유앵과 강장원, 임모씨와 김진진이 부부로 살았다. 임춘앵과 장월중선은 아주 다정한 친구 사이라 한다.
김화선은 14~15세 무렵에 서울 임춘앵 집에서 김화선 친구 한명(성명 미상)과 함께 김소희한테 판소리 수궁가 초입~<고고천변> 등을 사사했다.
김화선은 14세 무렵에 서울로 나갔다가 15세 무렵에 다시 정읍으로 갔다. 김화선이 정읍으로 간 15세 즈음에 정읍 부자 김평창 손자(당시 33세)가 머리를 얹어 주었다 한다.
김화선은 15세부터 3년간 정읍권번에서 강장원한테 단가 <백발가>(젊어 청춘), <초한가>, 판소리 춘향가 중 <기산영수>~<이별가>, 심청가 중 <집이라고 들어가니 방안은 텅 비어있고>,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부모 생각), 흥보가 초입~첫째 <박타령> 등을 배웠다. 이때 익힌 흥보가 중 <흥보 제비노정기>는 빠른 중중모리, “흑운 박차고~”라 한다.
강장원의 춘향가 중 <이별가>에서는 춘향이가 옷 찢고 소리 지르고 물건 집어 던지고 하는 부분이 안 나온다고 한다. 강장원이 춘향가 중 <‘궁’자 노래>를 부르는 건 김화선이 못 봤고 김화선은 강장원이 누구한테 <백발가>를 사사했는지 등의 얘기는 못들었다 한다. 강장원은 아편을 안했다 한다.
김화선이 정읍권번 소속시 많을 때는 기생 학습하는 동기만 열댓명이 있었고 나이 많은 언니들도 많았다 한다. 당시 일주일에 한차례 정읍권번 소속 동기가 두명씩 정읍 내장사에 있는 요리집에 국악을 공연하러 갔다 한다. 당시 동기는 머리를 땋고 머리를 얹히면 동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17세 넘는 동기는 없었다고 한다.
김화선이 정읍권번에 있을 때 정읍권번에는 판소리 사범이 강장원과 성명 미상의 모씨, 이렇게 두 명이 있었고 춤 선생은 없었다. 김화선은 정읍권번에서 강장원한테 판소리를 배웠고 성명 미상의 모씨에게는 판소리를 안배웠다.
김화선은 15세 경에 정읍권번에 정가 사범이 없어서 정읍의 한량을 찾아가서 가곡, 시조를 배웠다. 김화선은 15세 때 한달 동안 김수정(당시 50대 후반, 장성 사람, 가야금·양금·피리 명인)을 김화선 집에 스승으로 모셔다가 가야금풍류 48장과 가야금산조 한바탕, 양금 풍류를 익혔다. 김수정이 연주한 가야금산조는 다스름-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 순이라 한다. 당시 정읍권번에는 가야금 사범이 없었다고 한다.
김화선은 15세 무렵에 최막동에게 판소리 수궁가 중 <왕왈 연하다>~<고고천변> 등을 사사했다. 김화선은 15세 무렵에 김안식(당시 40~50세, 김화선 부친과 동명이인)한테 김안식 집에서 정계선, 임춘앵, 배화봉과 함께 남도민요 <새타령> 등을 사사했다. 김안식은 설장고 명인으로서 남도민요 <보렴>, <화초사거리>를 잘했다 한다.
김화선은 15세부터 17세까지 정읍권번에 소속되어 있었다. 김화선은 17세 때 정읍에서 함평으로 이사하고 18세 때 함평에서 목포로 이주하였다.
김화선은 17세 때 함평에 자주 온 임방울에게 단가 <호남가>와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사사했다. 김화선의 말에 따르면 임방울이 유명해진 것은 춘향가 중 <쑥대머리>에서 “내가 만일으~” 하는 부분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화선은 18~19세 무렵부터 2~3년간 목포권번에서 최막동(당시 50대 나이)에게 판소리 춘향가 초입~<이별가>, 심청가 거의 전판,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흥보가 초입~<흥보 제비노정기>(흑운 박차고), <놀보 제비노정기>(안남산),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등을 배웠다. 김화선이 목포권번에서 최막동한테 판소리를 배울 때 안채봉도 같이 사사했다 한다.
김화선이 목포권번 소속시 최막동이 유일한 판소리 사범이었다. 최막동이 목포권번에서 판소리를 가르치기 전에는 오수암이 판소리 사범이었고 최막동 다음으로 목포권번에서 판소리 사범을 한 사람은 안기선이라고 한다.
김화선은 오수암과 안기선한테는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고 오수암과 최막동은 나이가 비슷했으며 김화선은 오수암 성음이 수리성이라 한다.
최막동의 성음은 듣기 좋은 철성으로서 목구성이 좋았다 한다. 철성은 본래 판소리하기에 안좋은 성음인데 철성 중에도 특히 듣기 안좋은 철성이 있고 최막동의 성음과 같이 듣기 좋은 철성이 따로 있다고 김화선은 말한다.
김화선의 의견에 따르면 최막동이 오수암보다 소리를 아질다질, 아기자기하게 맛있게 했다고 한다. 김화선은 최막동의 스승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한다.
김화선은 성악가는 일단 성음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김화선은 수리성, 철성, 귀곡성, 애원성, 천구성이라는 말을 들어봤다고 한다. 김화선은 ‘마당목’이라는 게 있는데 이는 구성 없이 넙적해 가지고 넓게 쓰는, 멋 없이 내는 목이라고 한다.
김화선의 판소리 스승 임춘앵, 강장원, 최막동은 한결같이 노랑목을 절대 구사하지 못하게 했다 한다. 김화선은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라는 말은 들어봤고 경드름, 덜렁제, 잉애걸이, 완자걸이, 호걸제라는 말은 못들어봤다고 한다.
김화선은 18세 때 두달 동안 목포권번에서 한성기에게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배웠다. 한성기 가야금산조는 김수정이 연주한 가야금산조와 유사하다고 한다. 김수정, 한성기는 구식 산조를 연주했고 야질야질한 가락이 없고 다소 싱거웠다고 한다.
유대봉은 가야금산조를 잘한 천재 명인인데 신식 산조라 할 수 있고 야질야질한 가락을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유대봉은 재담도 무척 재밌게 하고 남을 잘 웃기는 재주가 있었으며 가야금을 굉장히 잘해서 ‘가야금 버러지’라는 별호로 불렸다 한다. 유대봉은 어디에서 가야금을 배우지도 않고 자득하여 연주를 잘한 것이라 한다. 유대봉은 봉사였는데 병원에서 치료받고 잘은 안보여도 눈을 떴으나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서 안타깝게 작고하였다 한다.
김화선이 정읍권번 소속시 조합장은 박모씨, 김화선이 목포권번 초기 소속시에는 조합장이 남자, 김화선이 목포권번 후기 소속시에는 조합장이 여자였다. 김화선은 18세부터 5년간 목포권번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목포권번에서 활동하면서 딸 둘을 낳았다 한다.
김화선이 목포권번 소속시 한농선이 목포권번의 동기였다. 김화선이 33세 때 목포를 떠나고 나서 막 신영희, 안향련이 목포로 왔다고 한다. 박보화(박보아)는 목포권번 시절 박농선으로 불렸다 한다. 목포권번 시절 김화선은 18세인데 20세라 하여 두 살 많은 박옥진과 친구가 됐다 한다. 당시 목포권번에는 무용 사범이 없었다고 한다.
김화선은 20여세 때 정모씨에게 단가 <백대영웅>를 배웠는데 참으로 맛있는 소리라 한다. 김화선은 지금은 성명이 기억나지 않는 모 스승에게 판소리 해방가를 사사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부르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광복 직후 김화선은 함평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김선일이라는 한량에게 판소리 안중근 열사가를 배웠다. 김선일은 전주 태생으로서 2009년 현재 80대 후반, 함평 지역의 치과 원장이며 예전에 명창 최일원한테 판소리를 익혔고 영광에서 국악 단체 생활을 한 바 있다. 김화선은 김선일과 함께 영광에서 국악 단체 생활을 했는데 이때 김화선은 영광 단체에서 판소리, 가야금, 한국 무용 <승무>, 창극 ‘춘향전’의 향단 역 등을 담당하였다.
김화선은 후손의 장래를 위해서 일찍이 국악계를 떠났다 한다. 그러다가 중년 이후에 서서히 국악 활동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김화선이 젊었을 때 함평 지역의 삼현육각 명인으로는 오영주(피리), 정산옥(피리), 임봉○(대
금) 등이 있었고 해금 연주자는 당시 못 봤다고 한다. 오영주, 정산옥, 임봉○은 1900년 이전에 출생한 명인들이고 모두 세습 전문 국악인 집안 출신이라 한다.
김화선은 젊었을 때 함평 지역에서 굿을 보기는 했으나 당시 당골 세습무 이름은 잘 모른다고 한다. 김화선은 한국 무용 <검무>의 경우 같이 출 짝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김화선이 국악계에서 체득하고 사용했던 은어(변말, 곁말)로는 세습 전문 국악인 집안 출신:산이, 기생:째생, 소리:패기, 장고:고장, 여자:해주, 남자:떼들이, 노인:구망, 영감:감영, 아이:자동, 먹는다:챈다, 죽음:귀사, 닭:춘이, 쌀:새미, 떡:시럭, 밥:서삼, 입:서삼집, 눈:저울고, 코:흥대, 발:디딤이, 얼굴:벤대, 옷:버삼, 거짓말:석부 등이 있다고 한다. 함평의 일반인들은 남자 소리꾼을 ‘광대’, 여자 소리꾼을 ‘기생’이라고 부른다 한다.
김화선의 말에 의하면 명창은 대부분 무식한 경우가 많았는데 동초 김연수는 유식했다고 한다. 박동진의 판소리는 유별나서 배우기가 어려운 소리라고 한다. 김화선은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김봉이가 명창이라는 말만 들었고 보지는 못했다 한다. 김화선은 이화중선, 임방울은 본 적이 있고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의 유성기음반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김화선이 현재 보유하고 실연이 가능한 전통 예능은 단가 <호남가>(임방울제), <홍문연>(강장원제:천하태평), <백발가>(강장원제:젊어 청춘), <이산 저산>(조상현 녹음 듣고 익힘), <편시춘>, <공도난이>, <천생아재>,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이별가>(최막동제), <쑥대머리>(임방울제),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심봉사 눈 뜨는 데>(최막동제),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최막동제), 수궁가 초입~<고고천변>(김소희제), 흥보가 초입~<흥보가 매품팔이 허탕치고 귀가하자 흥보처 좋아하는 데>(최막동제), 안중근 열사가(김선일제), 남도민요(최막동제)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 <새타령>(김안식제), 구음(자득/자장단 가능), 한국 무용 <승무>(임춘앵 사사), <살풀이춤>, 가야금 풍류(김수정 사사) 등이다.
김화선은 1992년 무렵부터 5~6년간 나주국악원과 김화선 자택 등에서 학생과 주부들에게 판소리와 고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현재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에서 살고 있으며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 주부들에게 판소리와 고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김금주는 15세 무렵에 김화선(당시 30여세)한테 함평군 대동면 김화선 집에서 판소리를 사사했고 현재 남원에서 살고 있다 한다.
김화선은 남편 모창하 사이에서 슬하 5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딸은 어려서 사망하였고 국악을 하는 자손은 없다고 한다.(1998.7.16, 1998.8.30, 2000.12.21, 2005.9.25, 2009.8.10. 김화선 증언)
김화선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대범하고 화통한 성품을 지닌 명인이다. 김화선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쩐 일인지 늙으니까 한이 다 어디로 가고 없어졌다고 한다.
김화선 명인은 본 음반 취입 섭외차 함평 자택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자들이 오늘은 허지 마라 해도 우리 집에 와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이렇게 늙었어도 보기 싫지 않으니까 오는 갑소. 고맙제라.”
2005년 김화선 명인 함평 자택에서 열린 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주최 김여막 적벽가 감상회 직후, "앞으로 건강하면 한번은 더 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마지막 작별일 지도 모르겄소. 잘 가시오." 하며 당시 78세 김화선 명인은 자택 대문을 나서는 손님들의 손을 꽉 잡았다.
다행히 그날이 마지막 작별이 아니었고 그로부터 4년 후 본 음반 취입까지 성사가 되었으며 김화선 명인의 근래 소리를 오래도록 깨끗한 음질로 보관하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두가 꿈만 같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 시대 무척 귀중한 존재 김화선 할머니가 82세에 생애 첫 독집 음반을 국악아카이브연구회 이름으로 출반하게 됨을 마음 속 깊이 축하드리며 김화선 명인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고수 : 김수미(판소리)
1971년 5월 1일 전남 목포출생
19994년 2월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학과 졸업
2002년 2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원 국악과 졸업
1983년 1월 목포시립국악원에서 판소리 입문 (사사 : 故 김흥남)
1985년~1986년 목포 은진고전무용연구소에서
판소리(사사:윤진철), 전통무용(사사:이은진),
가야금(사사:감미숙), 판소리고법(사사:감남종) 학습
1986년~1997년 서편제 박동실판 심청가, 유관순 열사가 학습
(사사 : 故 장월중선)
1997년~2000년 동편제 김세종판 춘향가 학습 (사사 : 성우향)
2000년~2003년 동편제 박봉술판 적벽가 학습 (사사 : 김일구)
2003년~2006년 동편제 박녹주판 흥보가 학습 (사사 : 박송희)
1992년 전국국악대제전 판소리부 일반부 최우수상
2003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창작판소리 사습대회 입상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
서울대학교, 전남대학교, 청주대학교, 백석예술대학교, 세종대학교 강사
순복음 보혈의 교회 국악성가대 지휘자 및 작곡가
고수 : 황금덕(단가)
1949년 11월 13일(음력), 1950년 1월 1일(양력) 출생.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신기산 778번지 태생.
2000년 김화선 문하에서 판소리, 고법 사사.
2001년 강진 남도국악제 신인부 우수상 수상.
2003년 추정남 문하에서 고법 사사.
2004년 나주 목사골국악경연대회 신인부 대상 수상.
2005년 무안 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도지사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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