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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명[부제포함] 서초국악포럼시리즈 2 <한주환의 대금세계>
음반 번호 AACD-002 , CD 2 매
제작 / 기획사 서초국악포럼
발매 연도 2009
구 분 일반반
분 류 산조
업데이트 일시 2009-03-29
비 고
* 2009년 8월 미의회도서관 및 미국 인디아나대학 전통음악도서관 기증. * 2012년 7월 11일 한국-인도문화원 기증(India) * 2018년 12월 6일 영국 University of London SOAS Library 기증(배송비 경기소리꾼 최병옥 후원) * 2019년 2월 22일 미국 미시건대학 아시아도서관 기증(배송비 친구 이봉희 후원) * 2020년 5월 12일 대만 국립대만대학 도서관 기증.



 
서초국악포럼시리즈 2 <한주환의 대금세계>

CD-1 :
• 대금산조 I
1. 진양조 SP오아시스 03:28
2. 중모리 SP오아시스 03:24
장구:미상, 녹음:1950년대 추정

• 대금산조 II
3. 진양조 LP성음레코드 04:52
4. 중모리 LP성음레코드 02:11
5. 중중모리 LP성음레코드 01:40
6. 자진모리 LP성음레코드 04:50
장구:미상, 녹음:1950년대 추정

• 대금·태평소시나위 병주
7. 중모리 LP성음레코드 03:47
8. 중중모리(굿거리) LP성음레코드 05:58
9. 자진모리 LP성음레코드 04:31
태평소:방태진, 장구:미상, 녹음:1950년대 추정

• 대금산조 III
10. 진양조 REEL-TAPE 11:12
11. 중모리 REEL-TAPE 08:46
12. 중중모리 REEL-TAPE 02:42
13. 자진모리 REEL-TAPE 08:16
장구:미상, 녹음:1959년
총 65:54

CD-2 :
• 대금산조 IV
1. 진양조 REEL-TAPE 04:54
2. 중모리 REEL-TAPE 03:18
3. 중중모리 REEL-TAPE 02:21
4. 자진모리 REEL-TAPE 02:29
장구:미상, 녹음:1950년대 추정
• 대금산조 V
5. 진양조 REEL-TAPE 06:03
6. 중모리 REEL-TAPE 02:51
7. 중중모리 REEL-TAPE 01:55
8. 자진모리 REEL-TAPE 03:20
장구:미상, 녹음:1950년대 추정

• 대금산조 VI
9. 진양조 REEL-TAPE 06:55
10. 중모리 REEL-TAPE 02:43
11. 중중모리 REEL-TAPE 02:05
12. 자진모리 REEL-TAPE 04:33
장구:미상, 녹음:1950년대 추정

• 대금풍류
13. 염불환입 REEL-TAPE 03:41
14. 타령 REEL-TAPE 02:16

• 보너스트랙 : 대금풍류 복원분
15. 염불환입 REEL-TAPE 03:53
16. 타령 REEL-TAPE 02:16
가야금/심상건, 장구:미상, 녹음/1959년
총:55:54

* 대금:한주환.
* 편집.마스터링:양정환 예술기획 탑 TOP ARTS

• 제작: 2009.3.8. 서초국악포럼
• 판매: 예술기획탑(www.gugakcd.com)
• 음반정보: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
• 해설: 이보형(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 이진원(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 표지설명: 김홍도 작품 중에서 대금악사만 발췌하고, 사진은 성음 DG가34 <호적(태평소)과 대금산조> 음반 자켓 뒷면에서 캡쳐하였다.

* 이 음반의 수익금은 전액 본 시리즈 제작에 투자됩니다.
 
* 운영자가 좌장으로 있는 서초국악포럼의 시리즈 2집이다. 자세한 내용은 운영자가 이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대금을 부는 연주자라면, 대금을 사랑하는 사람의 필청의 음반이다.(2009.3.29)
 
* 해설서에서 :

'한주환의 대금세계' 음반을 출반하면서...

서초국악포럼시리즈 1집 박동진 판소리 <예수전> 음반을 출반한지 2년 6개월이 훌쩍 넘었다. 음반이 제대로 판매되면 1년에 1장씩 출반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많이 늦었다. 회원들이 각출하여 1집을 제작하였는데, 2집을 출반하기 위해 또 갹출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 1집 판매 대금으로 2집 출반 자금이 마련되는 때를 기다리다보니 이렇게 늦었다.

서초국악포럼은 국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젊은 국악인, 어르신 국악인을 후원하기 위하여 2003년에 결성된 단체이다. 현재 11명으로 한 분기에 100,000원의 회비를 거두어 분기에 한 단체를 후원(1,000,000원과 축하화환)하고 있다.

이제 6년의 세월이 지나다보니, 후원하기 위한 가이드라인도 있다. 젊은 연주자,  어르신 연주자에 한한다. 연주 프로그램이 가급적 전통국악이어야 한다. 한번 후원한 단체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재차 후원하지 않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는 연주회는 제외한다. 본 포럼 회원 및 가족 등이 관련되어 있는 연주회의 후원은 신중을 기한다 등이다.

국가가 문화예술단체를 후원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있고, 기업이 후원하는 한국메세나협의회가 있다. 그리고 개인이 문화예술단체를 후원하는 단체도 있어야 한다. 그 단초가 서초국악포럼이 되기를 바래본다.

절반된 음반을 찾는 빈도를 보면, <예수전> 다음이 성음에서 출반된 <김소희 명창의 구음>음반이다. 이 음반의 재출반을 위해 저작권을 가진 분과 접촉을 하였지만, 불가능하였다. 그 다음으로, 주로 대금 연주자들이 애타게 찾는 음반이 한주환의 음반이었다. 대금산조를 짠 박종기 명인 이후 전설이 되어버린 한주환 명인의 현재 구할 수 있는 모든 음원을 집대성하였다. 대금 연주자뿐만 아니라 대금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흥을 줄 것으로 확신한다.

이 음반의 출반과 관련하여, ‘한주환의 생애’ 글을 다시 다듬어 실어주신 한국고음반연구회 이보형 회장님, 음원자료를 제공해 주신 김호성 선생님, ‘한주환의 대금산조 및 풍류’ 글을 수정하여 실어 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진원 교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특히 이 음반의 출반을 위해 너무나 수고해주신 본 포럼 회원인 양정환 선생님, 허갑균 사장님, 고마워요.

이 음반은 일련번호를 부여한 1,200장 한정반으로, 1 ~ 1,000번은 판매용으로, 1,001 ~ 1,200번은 홍보용으로 배부한다. 또 이 음반으로 발생한 이익금은 본 시리즈의 다음출반을 위하여 전액 투자됨을 밝혀둔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2009년 3월 8일 서초국악포럼 좌장 정 창 관


한주환의 생애

이보형(李輔亨)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대금산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명인이 누구인가? 이를 두고 박종기(朴鍾基)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단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비롯하여 경향에서 음악활동을 하였고, 더구나 그는 대금산조를 최초로 만들어 대금산조의 조종으로 꼽히고 있기에 어느 모로 보나 이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날 대금산조에 박종기의 영향이 그렇듯 절대적인가? 아니면 혹시 어느 절륜한 명인이 박종기의 화려한 역사의 그늘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일은 없는지? 그러고 보면 한주환이 바로 그러한 명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대금산조가 한주환 바디이거나 한주환 바디의 영향 아래 짜여진 것이라는 것, 그리고 한주환이 박종기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고 전해지지만, 한주환이 남긴 자료에 나타난 한주환 대금산조 바디와 유성기 음반에 담기어 있는 박종기 대금산조 바디를 견주어 볼 때 한주환 대금산조의 개성적 특성이 의외로 대단하다는 것, 한주환이 남긴 몇몇 자료에 나타난 것을 보면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대단한 연주기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두고 따져보면 이는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의문점이 뒤따른다. 한주환은 분명 박종기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고 전하는데 어찌하여 두 바디는 상상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가? 그렇듯 대단한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어찌하여 한주환은 박종기의 대금산조를 오늘날에 전해 준 교량적 구실을 한 것으로만 인식되어 왔는가? 그 절륜한 기량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는 한낱 수많은 대금산조의 명인 가운데 하나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의 행적에 대한 것이 별로 밝혀진 바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생몰 연대마저 불분명하니 말이다.

그가 오늘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필시 그가 살아왔던 시대적인 상황이 그를 끝내 역사의 그늘에 묻히게 만든 것이라 본다면 그의 생애와 음악학습과정과 연주활동 상황을 재삼 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주환의 출생연대는 대개 같게 기술되고 있다. 한주환의 출생연대에 대하여 김기수(金琪洙)는 그의 저서 󰡔국악입문󰡕(國樂入門)에서 1904년으로 적고 있고, 이는 장사훈(張師勛)의 󰡔국악대사전󰡕, 예술원의 󰡔한국음악사전󰡕, 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여러 문헌에 인용되어 있다. 이생강(李生剛)은 1904년 6월 8일이라고 한주환의 출생연월일까지 대고 있다. 이원기(李元基)가 1961년에 낸 󰡔국악예술인명감󰡕(國樂藝術人名鑑)과 1962년에 낸 󰡔한국연예대감󰡕(韓國演藝大監)에 한주환이 당시 57세라 하였다. 이로 보아 한주환의 출생 월일은 옳게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

한주환의 출생지를 많은 문헌에 단순히 전라남도 화순(和順)으로만 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화순군은 옛날 화순, 능주(綾州), 동복(同福) 세 고을을 합한 곳이라 그냥 화순이라 하면 그가 화순 땅 어느 고을에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국악예술인명감󰡕에는 화순군 동복면으로 밝혀져 있다. 동복 출생설은 이미 정달영(鄭達英), 원광호(元光湖), 이생강, 서용석(徐用錫) 등이 지지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한주환의 출생지가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寒泉里) 55번지이다. 동복땅은 지금 화순군에 속하는 면소재지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어엿한 고을이었고 한천리는 역(驛)이 있었던 곳이다. 옛날 역이 있던 고장이 대개 그렇듯이 한천리도 역마을<驛村>이라 주민들이 활달하여 놀기를 즐기는 성품을 지녔으니 음악인들이 살 환경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한천농악은 유명하여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한주환이 이 마을에 태어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에게는 한주환의 탄생지를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는 현장조사 경험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982년에 한천 농악조사를 위하여 한천리에 들렀다가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골목을 지나는데 한 노인이 어느 초가집을 가리켜 “이 집이 한주환의 난 집이요.”하고 가르쳐준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집에 들러보니 다 쓰러져 가는 조그마한 초가삼간(草家三間)인데 비워둔 지 오래되었던지 문짝은 다 떨어져 나갔고 지붕에는 풀이 한 길이나 자라 흡사 도깨비가 나올 것만 같았다. 수행하던 면사무소 직원이 이 마을 이장에게 “미클어 버리지 왜 여태 노와 두었디야”하며 넘어뜨리라 채근하였고, 나는 사진을 찍으며 이 집이 위대한 음악가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니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장에게 지번 (地番)을 물으니 한천리 55번지라 했다.

1985년에 산조 전승 실태 조사를 위하여 전라남도를 돌다가 한주환 유적지를 조사하고자 다시 한천리를 들렀더니 한주환의 생가는 이미 흔적도 없어졌고 집터는 남의 남새밭<菜田>이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주환에 대하여 물었으나 그를 아는 이는 노인 몇 분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주환은 어려서 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천농악 상쇠 노판순(盧判順: 本名 成樺, 戊午生)이 한주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주환의 부친은 한보일이며, 국악인으로 소리도 하고 쇄납도 잘 불었고 장구도 쳤다고 한다. 자식 6형제를 두었는데 넷째가 '젖둥이'라는 아명(兒名)을 가졌고 다섯째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조사 당시에 광주에 살고 있다고 했고, 여섯째 즉 막둥이가 한주환이라는 것이다. 노판순은 한주환이 10여세쯤에 한천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화순군 남면(南面) 내리(內里)로 이사가서 살았는데 몇 년 살다가 타관으로 나가 활동하다가 작고했다고 했고, 한주환은 한천리에 살면서부터 대금을 불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주환이 어려서 대금 학습하던 전설에 대하여 원광호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주환은 아주 어려서 대금을 배웠는데 밤낮으로 “뛰-”하고 김 넣는 연습을 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어린 한주환의 별명을 '뛰'라 불렀다고 한다. 또 항상 밤늦도록 김 넣는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한주환이 김 넣는 소리가 그치면 마을 사람들은 밤이 깊은 줄 알고 사랑에서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한다.

한주환이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난 만큼 대금을 배웠던 일은 당연하겠지만 부모가 한주환에게 다른 학습을 제치고 유독 대금을 배우도록 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한숙구(韓淑求)와 한수동(韓壽童)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에 대금과 가야금을 잘하여 천하 명인으로 손꼽히던 한숙구, 한수동 부자가 화순군 이서면(二西面) 보산리(寶山里) 적벽마을에 살다가 한천리에서 5킬로쯤 떨어진 그리 멀지 않은 화순군 남면 용리(龍里) 120번지 속칭 '배나드리'라고 이르는 마을로 이주했기 때문에 학습이 용이하다고 본 것이리라. 뒤에 한주환이 동복면 한천리에서 남면 내리로 이사한 것도 한수동 사는 곳과 가깝게 옮겨 살고자 한 것인 지도 모른다.

김명환(金命煥)은 한주환의 대금을 한수동에게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생강은 한주환이 한수동에게서 정악을, 전용선(全用先-秋山)에게 삼현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숙구에게서 시나위를 배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흔히 알기로는 한숙구나 한수동을 가야금 명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부자가 모두 가야금은 물론이고 대금도 천하 명인이었고, 그 밖의 악기에도 무불능통이었다고 한다. 한숙구가 대금 시나위로 천하 명인이었다는 것은 필자가 강백천(姜白川)에게서 들은 바 있다. 정달영은 한주환이 한숙구에게서 득음하였다고 하였다.

하여튼, 한주환은 어려서부터 한숙구나 한수동에게서 젓대를 배웠음은 분명한 일이고, 한숙구가 이미 고령이었으니 젊은 한수동이 주로 가르쳤을 것은 짐작이 가고 남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한주환은 박종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어려서부터 한숙구나 한수동 등 여러 선생에게서 시나위, 삼현육각, 줄풍류 등 갖가지 대금 음악을 배워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주환이 어느 때 박종기(朴鍾基)에게서 대금산조를 배웠는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생강은 한주환이 30세 쯤에 유성기에 취입된 박종기 대금산조를 듣고 대금산조를 자득(自得)한 뒤 1930년대(후반에?)에 광주에서 박종기를 만나 1주일간 배우고, 그 뒤 목포로 가서 자주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정달영은 한주환이 화순에서 거주할 때 주로 동복면 둔동리(屯洞里) 오판기(吳判基:일명 成大)의 풍류방에서 활동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오판기는 이 지역 토반으로 집안이 부유하고 풍류를 즐기어 집안에 풍류방을 꾸미고 많은 악사를 상주시켜 풍류를 하였고 삭회(朔晦-月會)와 춘추회(春秋會) 때에 는 큰 풍류축제를 벌였다 한다.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에 살던 한숙구, 한수동 부자를 남면 용리로 이주시킨 것도 오판기라 한다.

오판기 풍류방에는 한수동(가야금-거문고-대금), 정남옥(鄭南玉-가야금), 정학기(鄭學基, 정달영의 부친-피리), 박경석(朴景錫-가야금), 한주환(대금), 오진석(吳晋錫-피리) 등 쟁쟁한 음악인들이 풍류활동을 하였는데 뒤에 정달영이 참가하였을 때에는 한수동 등 고로들은 이미 작고하였고, 한주환(대금), 오진석(피리), 박경석(가야금), 정달영(양금, 가야금) 등 음악인들과 오씨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풍류객으로 참가하였다 한다.

한주환은 전라북도 전주(全州)로 거처를 옮긴다. 그 동안 화순에서 살다가 바로 전주로 이사하였는지 아니면 광주나 다른 고장에서 살다가 전주로 이사하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한주환이 전주에 거주한 곳을 두고 김동식(金東植)은 전주시 다가동(多佳洞)이라 하였고, 이생강은 전주시 풍남동(豊南洞)이라 하였다. 한주환이 어느 때 전주로 이거 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이생강이 11세때 전주 살던 한주환을 전주역에서 만나 부산으로 모셔다가 20일간 대금산조 20분 짜리를 배웠다고 말하였는데 이생강의 말대로라면 1952년 이전에 전주로 이사한 것이 된다. 해방 후에 소작제도가 폐지되어 지주가 쇠퇴하고 거기에다 6.25때 동복 오씨 집안의 몰락으로 풍류방도 사라졌고 해서 살길을 찾아 전주로 이사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무렵 한주환은 다른 국악인들이 흔히 그랬듯이 이른바 협율사를 수행하며 지방을 돌았다. 임춘앵(林春鶯) 단체 등 여러 단체를 수행하였는데, 정달영에 의하면 임춘앵 단체에는 김금암(金錦岩-炳昊 가야금), 정달영(가야금-아쟁), 한주환(대금), 오진석(피리), 김세준(金世俊, 金昌龍의 장자-고수)과 같은 악사들이 수행하였다 한다.

이생강은 한주환과 함께 방태진(태평소), 오진석, 신평일(申平一), 정달영, 강동일(姜東日)이 임춘앵 단체를 수행하였다 한다. 이 무렵에 한주환은 부산에 자주 드나들었다 하고, 이생강에 의하면 그가 20세 무렵에 한주환이 부민동 방금선(方錦仙)의 집에 기숙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에 대금산조 22분 짜리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방금선도 증언하고 있다. 이생강은 그 무렵에 권부자(權富子)라는 16세 소녀가 한주환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고 하는데 권부자가 한주환에게 대금산조를 배웠다는 것은 김기수도 기술하고 있다.

생전에 한일섭(韓一燮)이 필자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한주환은 그 무렵에 단체를 수행하게 되는데 한일섭도 같이 수행한 적이 많았다 한다. 그 때 한일섭은 한주환의 대금산조를 여러 차례 들어 이를 외우게 되었는데, 한주환이 타계한 뒤에 한일섭은 이생강, 원장현(元長賢) 등 여러 대금악사들에게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구음으로 가르쳐준 적이 있다고 한다. 원장현에 의하면 그가 한주환 류 대금산조를 익히게 된 것은 한일섭의 구음 학습에 힘입은 바 큰 것이라 한다.

전주에 살던 한주환은 돌연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의 상경 연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용석에 의하면 자기가 16세 무렵에 상경하여 이모 되는 박초월(朴初月)댁에 기거하며 이모부 김광식(金光植)에게 대금풍류 경기삼현육각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 한주환이 가끔씩 박초월 댁에 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1950년대 중반이나 후반에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문화가 급격히 소멸되면서 지방에서 국악이 공연에 참가하게 될 계기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한주환도 당시 무작정 상경 붐을 타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그의 거주지에 대하여 󰡔국악인명감󰡕과 󰡔한국연예대감󰡕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淸進洞) 235번지로 적고 있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협율사들은 거의 다 해산하게 되고 여기에 수행하던 악사들도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한주환도 이런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방황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당시에 서울에서 산조의 인식이 미미하여 공연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악사들이 극장에서 연주하는 것은 그나마 무용 반주 음악뿐인데 온통 경기 삼현육각이 주로 쓰이고 있었으니 그가 남도 삼현육각은 도무지 무용지물이어서 서울에서 한주환의 음악활동이란 옹색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대금산조로 천하에 그를 당할 이가 없는 그런 그가 서용석, 박동현(朴東炫)과 같은 24세, 25세되는 젊은 악사들에게 그의 대금산조와 경기 삼현육각과 서로 바꾸어 배우자고 제안하였을까? 그 덕에 서용석과 박동현은 대금산조를 익히게 되지만 한주환은 경기 삼현육각을 써먹지도 못하고 이내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주환의 작고 연대를 두고 문헌마다 설이 분분하다. 김기수는 그의 󰡔국악입문󰡕에 1966년으로 적었고, 이것이 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 관리국에서 1964년부터 무형문화재를 지정하게 되는데 그에 대하여 전혀 거론된 적이 없었던 것과 1965년과 1966년대에 그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아직 없다.

장사훈은 그의 󰡔국악대사전󰡕에 이것을 1944년으로 적고 있고 이를 예술원 󰡔한국음악사전󰡕에서 그대로 인용하고 있으나 1944년이면 해방 전인데 그가 해방 후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한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니 이는 큰 착오가 아닐 수 없다.

한주환 대금산조 쟈켓(성음레코드, 1971년 발매)에는 1960년 사망으로 적혀 있는 데 이 또한 의문이다. 이생강은 1963년 5월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용석, 박동현이 한주환에게 대금산조를 배우는 중에 한주환이 타계하였던 것이 그 무렵이니 가장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한주환은 대금산조로 당시에 첫손을 꼽는 명인이 되었지만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세계 제2차대전, 해방 후 혼란, 6.25 전쟁으로 세상에 도무지 기를 펼 겨를이 없었고 1960년 중반 이후가 되어서야 무형문화재로 지정, 대학에서 대금산조의 전공실기교육, 극장무대에서 대금산조 공연의 보편화 등이 이루어졌다.

그가 세상에 기량을 펴 보일 기회가 왔을 때에는 그 시대의 문턱에서 타계하고 말았으니 절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타계한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주환 류 대금산조는 갈수록 널리 연주되고 있지만 그는 자칫 박종기 대금산조를 오늘에 전승시킨 교량적인 명인으로만 인식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산조와 박종기 산조를 면밀히 비교 연구할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해방 후에 오아시스 유성기 음반에 그의 대금산조가 취입되어 발매되지만 라벨에 박주환이라고 연주자를 잘못 표기하여 발매되었다. 이생강에 의하면 이를 두고 한주환이 매우 속상해 하며 음반회사와 상대도 않았다고 한다. 한주환의 대금산조가 담긴 음반은 또 있다.

한 면에는 그의 대금산조를 담고 다른 면에는 그의 대금과 방태진(方泰振) 호적과 합주로 시나위가 담긴 것인데 성음 제작소에서 장시간 음반(LP)으로 나오게 되지만 그가 타계한 지 10년 가까이 되는 1971년에야 발매된 것이니 미리 녹음해둔 것임에 틀림없다.

근래에 그의 대금산조가 녹음된 수종의 자료가 발견되어 일제 때 취입된 박종기 대금산조와 비교하게 되고 이로써 새삼 한주환의 뛰어난 기량과 그의 개성적인 음악성을 발견하게 된다. 한주환의 대금산조가 박종기 대금산조에 기틀을 두고 있지만 그의 산조에는 또 박종기 산조에서 볼 수 없는 개성적인 특성들이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는 한주환이 박종기에게 학습하기 이전에 이미 한숙구, 한수동 등 여러 명인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임춘앵 단체 등 여러 단체를 수행할 때 여러 명인 명창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혀 나갔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특히 한일섭과의 교류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일섭의 부인인 남해성(南海星)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주환은 한일섭의 조카뻘 되는 가까운 친척이며 중년에 여러 해 동안은 협율사 단체를 같이 수행하였는데 그 때에 작곡 능력이 뛰어난 한일섭은 기묘한 가락이 떠오르면 한주환에게 구음으로 일러주었고 한주환은 이것을 그의 대금산조에 얹어 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주환은 그의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여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완성했고, 그것이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대금산조들의 모체가 되고 있어 음악사에 길이 공적이 남겠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기량을 마음껏 펼칠 기회를 갖지도 못하고 저승으로 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기량을 지녔던 거장이었음에 틀림없고 훌륭한 대금산조 바디를 남겼으니 그의 산조에 대한 음악적 연구는 한국음악학에서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주환 대금산조 및 풍류 - 이진원

대금산조를 창시했다는 박종기 이후 대금산조의 전설이 되어버린 명인, 그가 바로 한주환이다. 오늘날 수 많은 유파의 대금산조가 전승되고 있는데, 박종기의 더늠에 본인의 독특한 가락을 바탕으로 완성된 한주환류 대금산조는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금산조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된 이생강의 스승이 한주환이며, 서용석, 원장현 등의 대금산조 명인들의 기본 산조 가락이 모두다 한주환 대금산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한주환 명인의 삶과 예술은 여러 문장을 통해서 발표된 바 있다. 특히 이보형의 “한주환의 생애”는 주목할 만한 글이다. “한주환의 생애”는 1980년대 이보형의 현장조사를 통해 작성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에 기초하고 있는데, 현장조사 자료와 여러 문헌들의 기록을 통해 한주환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고 있다. 필자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대금산조󰡕에서 한주환의 대금산조를 살펴본 바 있다.

이보형의 “한주환의 생애”에 따르면 한주환은 1904년 전남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 55번지에서 부친 한보열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화순면 남면 내리로 10세에 이사와 살았고 이후 서울, 전주 등지에서도 거주하였다. 부친 한보일이 소리뿐만 아니라 태평소, 장고 등에 능했으므로 해서 한주환은 어려서부터 태평소등의 우리 악기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 음악에 젖어들 수 있었다. 대금산조 명인 이생강은 한주환이 한수동에게 정악을, 추산 전용선에게는 대금으로 삼현을 배웠으며, 30대 후반에 광주에서 박종기를 만나 산조를 배웠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한주환이 박종기에게서 대금을 배웠다는 시점이 30세라면 1934년이 되는데, 이 시기에 박종기는 이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3면의 산조 음반을 내고, 매우 유명해졌으므로 충분히 한주환이 박종기 음악을 접하고, 그 음악을 공부하고자 했을 수 있는 일이다.

한주환이 대금을 박종기에게 공부하기 전에 이미 한수동에게서 정악을 배웠으므로 한수동의 장기인 대금시나위를 접했을 것이고, 그 가락을 이미 습득했을 수도 있다. 한수동이 대금과 가야금에 달통한 명인이었으므로 박종기의 산조를 접하기 전에 배운 한수동의 음악이 한주환의 대금산조 깊숙히 녹아들었을 것이다.

박종기의 산조와는 다른 한주환 만의 독특한 산조에 대하여 이보형은 “한주환의 생애”에서 박종기에게서 학습하기 이전에 한수동이나 한숙구 등의 여러 명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임춘앵 단체 등 여러 단체를 수행할 때 여러 명창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혀 나갔는데 특히 한일섭과의 교류가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박종기 대금산조와 한주환 대금산조가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즉, 한주환은 한수동에게 전수받은 대금산조에다 대금산조의 틀을 완성한 박종기의 가락을 참고하여, 대금산조 한 바탕을 구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1) 한주환 대금산조 녹음

(1) 음반 녹음
한주환의 대금산조는 여러 차례 녹음된 바 있다. 그의 녹음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은 1950년대에 발매된 유성기음반 녹음이다. 그 유성기음반이 바로 Oasis 5630으로 발매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연주자의 이름에 오류가 발생해서 박주환이란 이름으로 발매되게 되었다. 이생강 명인에 의하면 한주환 명인이 이 음반을 취입하고 음반에 오자가 나자 대금을 던져버리고 불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화를 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음반을 들어보면 어느 누가들어도 한주환 명인의 연주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며, 이 음반에서 이미 그의 산조가 원숙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이생강 명인에 따르면 이 음반 이외에 한 장의 음반이 더 발매되었다고 하는데, 아직 그 음반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아래 진양조, 중모리의 장단 구성을 보아도 한 장의 음반이 더 발매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Oasis 5630 大琴獨奏 진양조 大琴朴周煥 伴奏오아시스國樂團
Oasis 5631 大琴獨奏 중모리 大琴朴周煥 伴奏오아시스國樂團

한주환 명인 작고 이후 1971년에 그의 대금산조가 12인치 장시간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이 음반이 성음제작소 DG가34 胡笛(太平簫)과 大琴散調 大琴韓周煥 太平簫方泰根인데, 약 20여분의 대금산조가 녹음되어 있다. 이 한주환의 대금산조의 뒷면은 방태근의 태평소와 함께 연주하는 시나위 합주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김호성에 의해 제작된 국악진흥보급회의 󰡔한국의 전통음악󰡕 시리즈의 음반에도 한주한 대금산조가 실려 있다. 이 시리즈는 1985년 대도레코드에서 제작한 카세트테이프로 발매되었는데, 󰡔한국의 전통음악(11) 산조(5)󰡕에 한주한 대금산조가 보인다. 김호성·이강근이 저술한 음반해설서 『한국의 전통음악󰡕에는 한주환 대금산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갈청이 찢어지는 소리, 산 속에서 우는 새소리, 귀곡성 등이 자연의 소리의 대변자가 곧 젓대이다. 정악대금의 취법과는 전혀 다른 산조 젓대의 소리는 허스키한 음성과 같다.” 후일 이 음반은 CD로도 다시 발매되었다.

(2) 릴테이프 녹음
필자가 한주환 대금산조의 릴테이프 녹음을 조사한 도표를 아래에 제시한다. 이 자료는 국립국악원의 󰡔국악연혁󰡕(國樂沿革),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한국 전통음악 자료 분류법󰡕과 임재원의 󰡔한주환류 대금산조󰡕 등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릴테이프로 녹음된 한주환의 대금산조는 문화재연구소 자료실, 국립국악원 자료실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자료들이 복제되어 개인 소장가들이 전하거나, 개인이 한주환 명인을 청하여 녹음한 경우, 혹은 방송국에서 방송한 것을 녹음한 경우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다.

소장처번호연주 곡목참고 자료국립국악원 릴-113대금산조󰡔國樂沿革󰡕 릴-117대금시나위 〃국립문화재연구소1182대금산조󰡔한국 전통음악
자료 분류법󰡕산조합주성금연, 방태근, 한주환김호성3종 대금산조개인녹음

이번에 복각되는 한주환의 대금산조는 아마도 현재 전통음악계에서 알려진 모든 음원을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러 경로로 입수된 한주환의 대금산조를 통해 그의 대금산조의 멋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한주한 대금산조 음악
한주환의 대금산조는 한수동, 한숙구의 음악과 박종기의 음악, 한일섭의 가락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주환의 제자 이생강은 한주환 명인 사후에 그와 같이 활동한 한일섭 명인에게 한주환의 대금 가락을 전해듣고 본인의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일섭이 한주환과 협율사 공연을 다닐 때 기막힌 가락이 떠오르면 한주환에게 구음으로 일러주고 한주환은 이를 대금에 옮겨 같이 연주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한일섭의 예술 또한 한주환의 대금산조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한주환이 남긴 대금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박종기 대금산조와는 다르게 중중모리가 들어간 것에서 다르다. 박종기가 중중모리를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자신의 산조에 넣은 것은 소리 더늠으로는 한주환이 가장 이르지 않나 생각된다. 한주환이 남긴 음악을 정리한 임재원은 “한주환류 대금산조의 음조직과 선율 특징”에서 한주환의 대금산조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장단 조의 구성 진양조 우조 계면조 변청계면조 계면조 변청우조 계면조 중모리 우조 계면조 중중모리 우조 호걸제 호걸제 자진모리 계면조 호걸제 계면조 변청계면조 계면조 우조

위의 조의 구성을 살펴보면 자진모리를 제외하곤 모두 우조로 시작하고 있다. 끝은 중중모리와 자진모리는 호걸제나 우조로 끝나지만 진양조와 중모리는 계면조로 끝난다. 변청계면조는 이생강의 대금산조의 생삼청이라고 하는 부분으로 대금의 기본청에 대한 4도 위의 엇청으로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위의 한주환 대금산조 조의 구성에서 중중모리에 계면조가 없는 것에 대해 임재원은 󰡔성음 DG가34 胡笛(太平簫)과 大琴散調 大琴韓周煥 太平簫方泰根󰡕 음반에는 계면조가 있다고 주에 부가하고 있으므로 한주환이 산조를 연주할 때마다 고정된 가락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연주할 때마다 즉흥성을 가미하여 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주환의 자진모리가 박종기의 오케음반의 국거리 처음 부분(느린 자진모리)을 연주하고 있는 것에서 임재원은 한주환의 대금산조 중중모리도 박종기의 영향을 받았고, 박종기의 산조가 전승되고 잇는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필자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시나위 더늠의 창시자 강백천의 대금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구성이 오늘날 대금산조의 기본틀이 되고 있다. 박종기가 중중모리장단으로 산조를 짜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중중모리로 연주했다면 한주환 처럼 연주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한주환의 중중머리는 박종기의 국거리의 음악 진행과 흡사하다.

한주환이 한참 대금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 대금 연주자들이 살길이란 굿판에서 대금을 불던가, 공연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연주하는 것 이상이 없없다. 박종기가 그러했듯이 한주환도 이러한 생활을 답습하게 된다. 박종기는 많은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였으나 한주환은 음반 취입은 등한시 했고 창극단체를 따라다니며 연주했다.

박종기 사후 현재 대금 명인의 사이를 이어주는 한주환은 당시의 극극, 창극반주 등을 도맡아 하였다. 최근에는 국악음반박물관의 노재명 관장에 의해서 한주환이 영화 음악 연주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음악 활동이 한주환의 대금산조의 표현력을 더욱 높여준 것이라 생각된다. 혹자는 한주환을 대금산조의 중시조라 하는데 한주환의 대통이 쪼개질 듯한 힘찬 성음과 심금을 울리는 듯한 절묘한 가락을 들어 보면 대금산조의 중시조라는 찬사는 아깝지 않다.

3) 한주환의 대금시나위
󰡔성음 DG가34 胡笛(太平簫)과 大琴散調 大琴韓周煥 太平簫方泰根󰡕 음반에는 대금과 태평소의 합주로 연주된 시나위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녹음이 유일한 한주한 명인의 대금 시나위는 아니다. 장단은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되어 있다. 대금은 줄 곳 계면조의 선율을 반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주환과 성금연, 방태진이 함께 연주한 산조합주에서는 대금과 태평소 이외에 가야금이 추가되어 절묘하게 산조를 합주하고 있는데, 본 음반에 수록된 대금 시나위와 유사한 가락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4) 한주환 대금풍류
한주환의 대금 풍류곡은 원래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자료 시리즈(17) 심상건 가야금 연주곡집󰡕에 심상건의 가야금 녹음을 소개하기 위해 수록된 바 있다. 위 음반이 발간되었을 당시에는 대금 연주자와 장구 연주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음반의 해설을 쓴 권도희는 대금과 가야금의 합주로 된 이 음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편, 가야금과 대금 가락이 서로 섞이는 방식은 마치 시나위 합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국립국악원과 같이 거의 같은 선율로 음역 차이를 보이는 합주가 아니고 대금과 가야금이 서로 다른 음역에서 교차하고 있다.”

처음 위 음반이 공개되었을 때 대금 연주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했던 것이 전추산의 연주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 이외에 또 이 연주 녹음을 소장하고 있던 김호성은 이 녹음 속의 대금 연주가 한주환의 녹음이라고 증언하였다. 이 녹음이 1959년 한주환이 대금을, 심상건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것이다.

한주환과 심상건이 남긴 풍류는 염불환입과 타령으로 영산회상 중의 두 곡이다. 2008년 12월 6일 한국고음반연구회가 주최한 제19회 <한국음반학술대회․복원연주회․전시회>에서 대금의 박환영, 가야금에 이초희, 장구의 신재현의 연주로 이 음악이 복원되었다. 이 연주를 담당했던 박환영은 이 음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음악적 어법과 시김새도 현재와는 아주 많이 달라 음악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달라진다는 것을 실감하는 풍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전승된 정악이나 다른 민간풍류에 비해 아기자기하며 아주 감칠맛이 느껴진다. 음악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음계는 Db조의 솔, 라, 도, 레, 미의 오음음계로 되어 있다. (정악대금으로는 중, 임, 무, 황, 태)에 맞고, 산조대금으로는 태, 고, 임, 남, 황에 맞는다.) 염불도드리는 음악이 진행되며 약간 빨라지며, 중광지곡과 같이 중간에 볶는 염불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타령은 8장단 째부터 점점 빨라져서 볶는 타령 장단으로 몰아친다.”

한주환과 함께 연주한 심상건(1889-1965)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가야금산조의 명인이다. 즉흥적인 가야금산조 명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일제강점기 제비표조선레코드와 콜럼비아 유성기음반에 가야금산조를 녹음하기도 하였다. 산조 이외에 병창·양금·거문고 풍류·해금에도 능하였다. 한주환과 함께 연주한 풍류는 심상건의 자유로운 음악 성향 또한 잘 나타난 민간 풍류 합주라고 볼 수 있다.


음반 해설
CD 1 :
1-2 트랙 : 대금산조 1
한주환이 처음으로 취입한 유성기음반에 수록된 대금산조 진양조와 중모리이다. 1분에 78회전되는 10인치 유성기음반에는 3분 남짓한 소리가 녹음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적 제약 때문에 전체 진양조와 중모리가 수록되지는 않았다. 진양조는 우조 10장단, 계면조 16장단으로 26장단 분량에 해당하고, 중모리는 또한 우조 10장단, 계면조 16장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음반은 비록 유성기음반으로 발매되었지만, 한주환의 대금 성음의 절묘함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의 명반이라 할 수 있다. 우조는 우조답게, 계면조는 계면조답게 각종 시김새를 구사하여 대금산조를 이끌어 간다.

3-6 트랙 : 대금산조 2
유일하게 LP음반(장시간음반)으로 발매된 대금산조이다. 이 음반은 한주환 명인 사후에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을 발매한 성음제작소는 당시 주문 제작으로 이 음반을 만들었고. 때문에 이 음반의 마스터는 현재 소재불명으로 남아있다. 이 녹음은 음질이 깨끗하고, 에코가 많이 들어가 있는 특징이 있다. 이 대금산조는 진양조 33장단, 중모리 15장단, 중중모리 27장단, 자진모리 114장단으로 구성되었다.

7-9 트랙 : 대금 ․ 태평소 시나위 병주
전통악기의 음량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대금과 태평소의 병주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주환과 방태근(혹은 방태진)은 이러한 우리의 상상을 깨고 대금과 태평소의 절묘한 시나위 병주를 녹음하였다. 앞의 대금산조 2와 더불어 󰡔성음 DG가34 胡笛(太平簫)과 大琴散調 大琴韓周煥 太平簫方泰根󰡕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곡이다.

10-13 트랙 : 대금산조 3
대금산조 3은 녹음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진 한주환 대금산조의 하나로서, 가장 길이가 긴 대금산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음반은 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임재원 교수에 의해서 채보, 연구된 바 있다. 진양조 76장단, 중모리 60장단, 중중모리 49장단, 자진모리 203장단 등 장단수도 여타 한주환이 남긴 대금산조에 비해 월등히 길며, 그 음악적인 변화도 다양하다. 다양한 청의 변화로 하나의 청을 사용한 단조로움을 탈피하였으며, 다채로운 시김새를 구사하여 변화무쌍한 대금 가락을 선보이고 있다. Bb우조, Eb우조, C계면조, F계면조, 호걸제 등의 다양한 음조직을 사용하고 있다.

CD 2 :
1-4 트랙 : 대금산조 4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구성된 대금산조이다. 음질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러 번 복사된 녹음으로 볼 수 있다. 시작부분 첫 장단의 소리가 빠져있다. 비록 음질은 좋지 않지만, 신들린 듯한 대금 연주가 돋보이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한 음, 한 음 명확하게 끊듯이 정확히 꽉찬 소리를 들려주는 한주환 대금산조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5-8 트랙 : 대금산조 5
릴테이프 잡음이 많이 들어간 녹음이다. 이 녹음은 1950-60년대 라디오 방송에서 생방송한 것으로 대금산조 자진모리 이후 “아, 좋습니다. 한주환씨의 대금독주를 마치겠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한주환 명인이 방송에 출현해서 대금산조를 연주한 기록이 되는 중요한 녹음이라 생각된다. 안타깝게도 이 녹음은 섬세한 대금의 음색이 모두 사라진 체로 남아있다. 중모리 시작과 가락을 이끌어 가는 것이 요즘 연주되는 한주환 대금산조와 조금 다른 것이 특징이다.

9-12 트랙 : 대금산조 6
대금산조 5와 같이 진양조 앞부분이 잘린 듯 하다. 요즘 대금산조 진양조의 두 장단 정도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다른 연주와 같다. 녹음이 오늘날까지 전달 전달되는 과정에서 속도가 조금 빨리 녹음된 듯하며, 여타 한주환 대금산조 보다 전체적으로 음이 조금 올라가 있다. 자진모리의 휘몰아치는 남성적인 가락의 매력과 짜임새있는 구성이 돋보인다.

13-14 트랙 : 대금풍류
산조의 명인들은 대부분 민간 풍류의 명인이었다. 한주환도 염불환입과 타령을 가야금산조의 심상건 명인과 함께 남겼다. 구체적인 음악 내용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설명한 바 있으니 참고 바란다. 이 녹음을 제공한 김호성에 따르면 이 음악은 1959년 릴로 녹음된 것이다. 한주환이 매우 독특한 민간 대금 풍류 음악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녹음으로, 이러한 성음의 민간 대금 풍류 음악을 재현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5-16 트랙 (보너스 트랙): 대금풍류 (13-14트랙 복원본)
이 보너스 트랙은 13 트랙의 없어진(?) 앞부분 두 장단 12박을 기존의 가락 안에서 찾아 복원시킨 음원이다. 13-14 트랙과 똑 같은 음원이다.


대금명인 한주환 음반 작업을 하면서... - 양정환(탑예술기획 대표,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

이 음반은 대금명인 한주환의 유작 모음집으로 유성기음반(SP), 릴 테잎, 레코드(LP)판에 남겨져 현재까지 발견된 음향자료전집이다. 특히 한주환 가락은 현재 연주되는 여러 유파의 대금산조, 시나위의 골격을 이루고 있어 중시조로 칭하기도 하는데, 더욱 전설적 명인으로 기억되는 그의 연주공력으로 볼 때 여러 음향자료로 전해지는 산조와 시나위는 특성상 각각의 독특한 가락과 맛을 지니고 있다하겠다.

유성기음반을 제외한 여타의 자료는 음반 발매를 위해 정식으로 녹음실에서 한 것이 아닌 사석에서의 현장음악 또는 흘러나오는 방송녹음으로 여겨지며 음질이 열악하고, 또한 테잎 자료 특성의 회전 편차에다 여러 번의 복사로 변질되고, 여기에 일부자료는 줄풍류 음악처럼 첫머리 가락이 누락 된 것도 있었다. 그래서 한 종류뿐인 줄풍류 자료 중 염불도드리는 시작하는 앞의 누락된 가락인 두 장단 12박을 그 곡 안에서 복사·편집·복원하여 보너스 트랙으로 마지막에 넣었다.

산조·시나위·풍류를 막힘없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표현하는 그의 천재적 예술성은 이 음반을 작업하는 내내 각각의 음향자료마다 따라다니는 질기고도 시끄러운 잡음을 잊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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