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최초의 녹음                                                                                       

  우리가 찾아와야 할 6개의 에디슨원통형실린더음반                                                 

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정 창관          

 

 * 객석 200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민족 최초의 녹음

우리가 찾아와야 할 6개의 에디슨원통형실린더음반

 

한국고음반연연구회 부회장 정 창관

한민족으로 처음으로 녹음한 사람은 누구일까? 토마스 에디슨이 1877년 12월 6일 ‘메리는 작은 양을 가졌었지’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재생 가능한 알루미늄 롤에 담았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1850년에 프랑스의 식자공인 스콧 드 마르탱빌이라는 사람이 10초 정도의 노래를 숯종이에 새겨 넣었다고 확인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1877년 에디슨의 녹음을 인류 최초의 녹음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한민족 최초의 녹음은 그 이후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 중에서 한민족 최초의 녹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 경기명창 박춘재의 녹음에 대하여

유성기가 처음으로 궁중에 들어왔을 때, 고종의 명에 의해 박춘재 명창이 처음으로 소리를 집어넣었다는 이야기로, 소리로 재생된 박춘재의 소리를 듣고, 고종이 ‘춘재야, 네 명이 십년은 감해졌구나.’라는 일화와 더불어, 고종의 권위와 박춘재라는 타당성 있는 인물의 등장으로 박춘재 명창을 처음으로 녹음한 인물로 인식되게 하여왔다. 이는 녹음한 정확한 년도가 없이 인용되고 있으며, 유성기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년도가 1899년임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이라도 그 년도는 1899년 이후라고 추정된다. 또 한민족의 첫 녹음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경기명창 박춘재가 시카고에서 녹음을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화는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1893년 박람회에 참가한 사람은 10명의 장악원 악사들로 박춘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가지 않은 사람이 녹음을 했을 리는 없으니, 이는 와전된 이야기이다. 2003년에 한국대중예술문화원에 간행된 ‘한국대중가요사’에서 조차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박춘재 명창의 취입이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여기 저기 잘 못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 1983년 시카고에서의 녹음에 대하여

1851년 세계최초의 세계박람회가 런던에서 개최된 후, 42년만인 1893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콜럼비아세계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은 처음으로 시카고세계박람회에 참가하였다. 박춘재 명창은 아니지만, 당시에 박람회에 참가한 악사들이 녹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필자는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1893년 출품대원 정경원을 비롯한 장악원 악사 10명(신흥석-대금, 이재룡:피리, 안백룡:가야금, 이경옥:비파, 이창업-장고, 최을룡:피리, 강삼석:해금, 이경룡:거문고, 이수동:교방고, 정기용:피리) 등 13명이 시카고박람회에 파견되었다. 일행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륙횡단기차를 타고 1893년 4월 28일에 시카고의 유니온 역에 도착하였다. 도착 첫날 팔머하우스에서 숙박하였으나, 숙박비가 너무 비싸 다음 날 다른 숙박지로 옮겼다. 악사들은 개회식 날인 5월 1일부터 귀국하는 5월 3일까지 제품전시관에서 연주하였으며, 5월 1일 개회식 때는 전시장에 온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을 위하여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연주한 곡은 어전법악(황풍악)으로 알려져 있으며, 외국인들은 국악연주를 심벌 소리처럼 들렸다고 전하고 있다. 악사들은 시카고에 머문 일자가 5박 6일 밖에 되지 않아, 시간상으로 녹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당시의 에디슨형 원통형 음반의 녹음기술은 10명의 관현악 연주를 담을 수준이 아니었다. 기껏 독창이나 기악 독주를 집성기(혼) 바로 앞에서 연주하여 원통형 실린더에 담는 기술수준이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의 프로바인 교수는 1893년 박람회와 관련하여 원통형 음반이 200매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그 목록에는 Korea라는 단어를 찾을 수 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생소하였기 때문에 우리 음악을 녹음을 하고, 표기가 안 되었을 경우가 있을 수 있어 200개의 실린더 음악을 다 들어보아야 한다고는 하였지만,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만약 그 때 장악원 악사들이 녹음을 하였더라면 인솔자이며 영어가 가능한 정경원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고, 당시에 녹음은 아주 특별하고 신기한 행위로 간주되어, 녹음을 하였더라면 정경원이 녹음에 대하여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거나 일기에 적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어디에도 녹음에 관한 기록은 없다. 고로 필자는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에서는 한민족의 최초의 녹음이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는다. .

- 1896년 7월 24일 워싱톤에서의 녹음에 대하여

1998년 4월 25일 한국국악학회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현재 메릴랜드 대학의 프로바인 교수가 1896년 7월 24일에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인 엘리스 플래처 여사가 워싱톤에서 3 인의 조선인의 소리를 처음 담았다고 소개하고, 카세트테입으로 그 음악을 들려주었다. 프로바인 교수는 미의회도서관의 목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음원을 발견하고, 미의회도서관으로부터 음원을 DAT테이프로 받았다고 하였다.

앨리스 플레처 여사(1838-1923)는 1880년대 인디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여성 인류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플래처의 업적은 인디언 음악에 집중되어 있지만,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조선인의 음악을 녹음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6개의 실린더에 모두 11곡이 실려 있다. 실린더 마다 당시에 플래처 여사가 적은 메모가 남아 있으며, 이 메모와 같이 6 개의 실린더 음반은 미의회도서관에 기증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다. 6 개중 한 개는 기증 전에 파손되었으며, 1개는 기증 후에 파손된 상태이다. 이 실린더에 담긴 음악은 1980년에 미의회도서관의 ‘Federal Cylinder Project'에 의거 실린더에 대한 구두설명과 함께 릴테이프로 전환되었으며, 지금은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하면 CD음반으로 제작하여 보내준다.

11곡의 내용은, 단가(Introductory Song for Dan-ga(Korean Play)- 0:50), 매화타령(Blooming Plum Tree Song- 0:27), 애국가 1(Patriotic Song 1- 0:56), 애국가 2(Patriotic Song 2- 1:02), 간주-손장단(Interlude-clapping of hands- 0:34), 사랑노래-아라랑 1(Love Song:Ar-ra-rang 1- 1:32), 사랑노래-아라랑 2(Love Song:Ar-ra-rang 2- 0:08), 사랑노래-아라랑 3(Love Song:Ar-ra-rang 3- 1:25), 설화노래-제비잡는데(Myth Song, “Catching the Swallows”- 1:44), 동요-달아 달아(Child's Song, “About the Moon”- 0:55), 마일맨의 노래 (Mile Man Song- 0:43)이다.

이 녹음에는 아리랑의 근원을 밝혀줄 ‘아라랑’이라는 음악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라랑’을 ‘사랑노래’하고 표현한 사실, 또 노래를 ‘애국가’라고 적은 사실, 또 그 당시의 발음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는 그 당시의 대중가요이며 유행가이다.

소리꾼은 3 사람으로 플래처 여사의 메모에 의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플래처 여사의 메모 글씨가 악필이라, 미의회도서관에서 옮겨 적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견된다. 소리꾼으로 Jong Lik Aju, Hechel-ye 또는 He-chel ge, Son Long으로 미의회도서관에서 이기하였으나, 프로바인 교수는 이를 Jong Sik Ahn, He Chel Ye, Son Rong으로 수정하였고, 모든 메모를 영어로 확인하여 2007년에 한국고음만연구회의 학술지 ‘한국음반학 제17호에 발표하였다.

프로바인 교수는 1896년 5월 8일자 The Washington Post 지에, ‘Seven Koreans at Howard’ 라는 제목으로 "동방에서 온 학생 7명이 하워드 대학교에 들어오다. 조선인 학생들로 다들 귀족 출신이고, 영어는 전혀 못하였다. 여섯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작았다. 다들 머리색이 검고, 몽골계 특징으로 눈이 작다…… 이들이 도착한 날 학생들 사교 모임이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관찰하는 모습이었다, 여학생들이 조선인 학생들을 둘러싸고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자, 처음에는 못 한다고 하더니, 결국 마지못해 스와니 강과 한국민요 등 몇 곡을 불렀다.”라는 가사를 보여주면서, 노래를 한 소리꾼이 이들 유학생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얘기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애나 톨맨 스미스가 친구이자 동료인 플래처 여사에게 알렸고, 플래처 여사는 친구인 애나를 위해 조선인 학생들의 음악을 녹음한 것으로 프로바인 교수는 추정하면서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1896년 7월 24일, 조선인 남성 3 명이 워싱턴 시내 국회의사당 인근에 있는 앨리스 플래처 여사의 집을 찾는다.

"양반 체면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간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리네만……"

"여긴 미국일세. 그리고 우린 엄연히 부탁 받아 가는 게 아닌가."

"그렇네. 무슨 기계에 대고 노래만 부르면 되는 거라네. 우리 노래를 녹음해서 후세에 남긴다지 않나. 학문 연구가 목적이라니 도와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네."

이렇게 하여 한민족 최초의 녹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 1896년 7월 24일 워싱톤 녹음에 참여한 소리꾼

2008년 2월 14일 프로바인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운중관 회의실)에서 한만족의 첫 녹음에 대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를 계기로 프로바인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이완범 교수가 소리꾼의 3 사람 중 2 사람이 책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1989)의 329 페이지에 ‘1896년 10월 1일 하워드대학의 한인학생들’이라는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지금까지 소리꾼이 영어 스펠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안정식’인지 ‘안종식’인지, ‘이희철’인지 ‘이혜철’인지 불명확하였지만, 이완범 교수는 사진과 함께 안정식과 이희철로 확인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안정식(安禎植)은 제일 좋은 가문 출신으로 약 200명의 유학생과 더불어 26세인 1895년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경응의숙(현재 게이오대학)에 입사하였다. 이듬해 1896년 2월 27일부터 28일 사이 일본 경응의숙 기숙사를 도망하여 미국으로 도항했다. 안정식은 경기도 광주부(廣州府) 상림(祥林)에 거주하였으며 호주였다. 안정식은 임병구, 이범수, 김헌식, 여병현, 이하영과 함께 도쿄 재일공사가 재미공사 서광범에게 보내는 서신을 소지하고 2월 28일 요코하마발 캐나다 태평양 철도회사의 기선 Empress of India호에 탑승하여 4월 11일에 밴쿠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영어도 할 줄 모르면서 단돈 500엔만을 들고 도항하였으므로 교통비가 없어 밴쿠버에 머물렀다. 서광범 공사는 이들의 연락을 받고 워싱톤으로 올 수 있도록 교통비와 여관비를 지불하였다. 4월에 도착한 이들을 서광범 공사가 주선하여 하워드대학에 입학시키고, 거처할 집을 제공받았으며, 몇몇 인자한 부인들이 이들의 식생활을 책임졌다. 5월에 공부하기 시작하였을 때는 영어를 통 몰랐으나 가을학기에는 정규과목을 택할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이 하워드대학에는 경응의숙 유학생 6인 외에도 이희철이 있었는데, 1896년 하워드대학 연차보고서의 한국인 7인은 안정식과, 함께 간 5인과 이희철로 판단된다. 이희철(李喜轍)은 경성 서부차동(西部車洞) 이용만의 장남으로, 1895년에 경응의숙에 입사하였으며, 당시 25세였다. 남은 한 사람(Son Rong)은, 7인 중의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름으로 유추하여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 다른 가능성에 대한 추정

1893년 시카고박람회 때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던 박용규와 서병규라는 2 사람이 박람회의 대표인 정경원을 찾아왔으며, 이 사람들이 당시 박람회장의 한국전시관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에 시카고뿐 아니라 미국의 다른 지역에도 한국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람들이 미국의 인류학자나 민족학자 등에 의해 단편적으로 우리음악을 녹음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1896년 7월 24일 이전의 녹음 자료가 발견될 때까지 그 가능성을 열어둘 수밖에 없다. 1896년 이후 실물로 확인되는, 1907년 미국 콜럼비아사에서 출반한 최초의 상업용 음반인 쪽반(평면음반의 한 면에만 음악이 담김)이 등장한다. 1896년과 1907년 사이에 국내에서 실린더 음반에 우리음악이 녹음되었다는 기사가 간혹 보이나. 실린더 음반의 그 파손성을 고려할 때, 현재 남아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 우리가 찾아와야 할 문화유산

미의회도서관에 있는 6개의 에디슨 원통형 실린더 음반은 분명히 미국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로서는 후손에게 물려주어야할 역사적인 문화유산이기도하다 필자가 미의회도서관의 한국인 사서와 접촉한 바로는, 미의회도서관은 앨리스 플래처 여사가 이 실린더 음반을 미의회도서관에 기증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이 음반을 기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파손의 위험(실제 6개 중 하나는 미의회도서관에 온 이후 파손됨) 때문에 이 실린더 음반을 미의회도서관에서 버지니아에 있는 국가기록보관소로 옮길 예정이라고 하였다. 국가기록보관소로 옮기게 되면 한국으로 오는 것은 더 어려울 것 같다. 옮기기 전에 미국과 한국의 우호관계를 고려하여, 국가차원에서 영구임대 등의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미국으로 보아서는 수백 개, 수천 개의 중의 6 개의 실린더 음반이지만, 우리민족으로서는 유일한 6 개의 실린더 음반이다. 관계기관의 관심을 촉구하는 바이다.

1907년에 상업용 음반으로 녹음된 미국 콜럼비아 음반과 1908년의 미국 빅터 음반의 음원도 미국의 어디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본 동경대의 학자는 미국을 방문하여 자기들의 자료를 다 파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사를 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사료되나 함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음원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찾아내어 우리나라로 가져와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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