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숙영낭자전>                                   
  


조선 후기에 연행되던 판소리의 하나로, 정노식의 “조선 창극사”에 열두마당 중의 한 곡으로 소개되어 있다. 판소리에 바탕이 된 고전소설은 ‘낭자전’, ‘수경낭자전’, ‘수경옥낭자전’, ‘숙향낭자전’ 이라고도 불리며 한문소설 ‘재생연’(再生緣)을 번역·증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료가 전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숙영낭자전의 내용은 세종 때 경상북도 안동에 백상군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뒤늦게 명산대찰에 빌어 선군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선군이 자라자 백상군은 아들의 혼처를 사방에 알아보는데, 선군은 책을 읽다가 잠깐 졸던 꿈속에서 숙영이라는 선녀를 만난다. 그후 선군은 숙영을 그리워하다가 상사병이 들어 어떤 약도 듣지 않고 다 죽게 되었다. 선군의 목숨을 염려한 숙영은 다시 꿈에 나타나 옥련동에서 만나자고 한다.

꿈에서 깬 뒤 선군은 병이 나았고, 유람을 구실로 집을 나와 숙영을 만나게 된다. 숙영은 인연을 맺기에는 3년이 남았다며 달래나, 선군은 듣지 않고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남매를 낳고 부모를 모시며 10년을 하루같이 금실 좋게 살았다. 아버지 상군은 선군에게 과거를 보라고 하나, 숙영과 떨어지기 싫은 선군은 번번이 거절하다가 할 수 없이 과거길에 오른다. 그러나 가던 중 숙영이 그리워 2번이나 수십 리를 되돌아와 함께 밤을 보낸다. 며느리 방에서 남자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백상군은 숙영을 의심하게 되고 평소 숙영을 질투하던 시비(侍婢) 매월은 동네 불량배와 짜고 숙영에게 누명을 씌운다. 백상군이 호되게 죄를 추궁하자 숙영은 억울함을 참지 못해 자결하고 만다.

칼과 시체를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고 몇 개월이 지나도 썩지 않자 상군은 선군이 이를 보면 함께 죽을 것을 염려하여 풍산의 임소저와 혼약을 해둔다. 장원급제하여 돌아오던 선군은 꿈속에서 숙영의 원통한 죽음을 보고 황급히 집으로 와서 통곡하며 매월 등을 처벌한다. 며칠 뒤 숙영은 옥황상제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며 선군은 숙영의 권유로 임소저를 후실로 얻어 행복을 누리다가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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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음반 :
   박송희 판소리<숙영낭자전>

박송희 명창은 1927년 음력 7월 28일 전남 화순군 화순면에서 태어나 10대 때 성차옥한테 단가 <뒷동산>, <인호상이>, <죽장망혜>를 배웠다. 박송희는 14~15세에 1년간 전남 화순 박기홍(朴基洪) 문하에서 단가와 흥보가, 심청가, 춘향가를 배웠고 15~16세 때는 정응민 문하에서 심청가를 사사했다. 그리고 16~17세에는 1년간 전남 화순 안기선 문하에서 단가와 흥보가를 배웠다. 또 17~18세 때 김영준에게 적벽가를 익혔다. 박송희는 17~18세 때 광주 권번에서 박영구에게 전통춤과 가야금, 양금, 정가를 사사했다. 그리고 그 무렵 박송희는 박동실한테 판소리도 배웠다. 그리고 박송희는 17~18세 무렵부터 1년간 동일창극단에서 조상선한테 단가, 판소리, 민요, 창극의 토막소리를 배웠다.

박송희는 혼인 후 얼마간 잠시 가정생활을 하다가 상경하여 박귀희, 김소희가 이끄는 여성국악동호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박송희는 이 여성국악동호회에서 틈틈히 박록주에게 토막소리를 배웠다. 박송희는 1960년 무렵 창극 단체들이 대부분 해산되자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렇게 수 년간 지내다가 그의 막내아들이 8개월쯤 될 때 서울에 올라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박송희는 그 당시 서울로 온 직후부터 2년간 김소희 문하에서 춘향가 중 <기산영수>~<이별가>와 심청가 중 <아버지 듣조시요>~<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를 배웠다.

그 후 박송희는 박록주를 찾아가서 흥보가를 배웠다. 그로부터 2년 뒤 박록주가 중요무형문화재 춘향가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면서 박송희는 그의 전수생이 되어 춘향가를 배웠다. 또 나중에 박록주가 흥보가 인간문화재로 지정 종목이 바뀌고 나서는 박송희는 박록주가 타계할 때까지 흥보가를 집중적으로 사사했다. 이 때 박송희는 박록주에게 흥보가를 비롯해서 단가, 숙영낭자전도 틈틈히 익혔다. 1960년대에 박록주가 박봉술에게 박송희한테 적벽가 좀 가르쳐 주라고 해서 박송희는 박봉술로부터 적벽가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박송희는 박봉술에게 수궁가 중 <용왕 탄식>~<도사 등장> 등을 배웠다 한다.

그리고 박송희는 1970년대 초반에 몇 개월간 허규 주도로 국립창극단 단원이 모두 단체로 정권진 문하에서 심청가를 배울 때 함께 이 소리를 익혔다 한다. 이 당시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배운 판소리 특별 강좌로는 이밖에도 정광수 강의 수궁가, 박봉술 강의 적벽가가 있었고 그후 1987년에는 성우향이 심청가와 춘향가를 국립창극단 단원들에게 가르쳤다. 또 박송희는 예전에 김옥진한테 김옥진 작곡의 신민요 <야월삼경>, <꽃이 피었네>를 배웠다.

박송희는 박록주한테 배운 숙영낭자전에 아니리가 없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리를 짜려고 소설 숙영낭자전을 보았더니 판소리 숙영낭자전과 사설이 매우 달랐다 한다. 그리고 박동진이 짠 숙영낭자전은 박록주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한다.

박송희가 박록주한테 배운 숙영낭자전은 박록주의 스승 정정렬이 작곡한 것으로서 이는 박록주의 제자 박송희, 박초선가 잇고 있으며 박록주 후로 이 소리를 독창으로 음반에 남긴 이는 오직 박송희뿐이다. 바로 이 음반이 그 소중한 기록물이다. 박송희는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이다.(2004.11.30)

* 숙영낭자전의 유일한 음반이다. 지금도 구할 수 있다.(201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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