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조선민요의 연구'에 근거한 <새로운 창녕아리랑> 관련 자료실                      

 

2. 음반 해설서 내용 -1 (앞 부분 : 축하글 등)

           

 

이 음반을 나의 고향, 창녕에 바칩니다.

제작·기증자: 정창관(정비앤에이() 대표 / www.jungbna.com)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객지에서 산 시간이 더 길지라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정지용 시인이 향수에서 노래한 것같이 누구나 죽을 때까지 그리워한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미국 국민에게 국가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라고 갈파하였다. 이 문귀는 한 평생 내 가슴속에 간직되어 왔다.

내가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국악애호가이다. 오랫동안 국악을 좋아하다보니 어느새 전문가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국악음반을 만드는 일이다. 몇 년전에 일제강점기에 창녕아리랑이 있었다는 글을 보게 되어, 연구를 하게 되었고, 작년에 고향을 위해 창녕아리랑음반을 제작하여 고향에 기증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 음반은 탄생하게 되었다. 어느 지자체가 만들더라도 이보다 더 잘 만들 수 없을 정도로 혼신을 노력을 다 하였다. 기증의 뜻을 희석하지 않기 위해 창녕군의 금전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진행하였다.

이 음반의 기증에 도와주신 분들이 많다. 형님(정규창), 동생들(정창술. 정찰길)의 지원이 있었기에 이 기증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소리꾼, 작곡자, 작사자, 유지숙 명창, 국악방송국은 창녕군에 저작권을 기증한다는 조건에 동의해주었다. 음반 제작을 도와주신 재경창녕향우회, 창중총동문회와 창중20회 동기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는 바이다. 해설서에 글을 보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하다.

창녕아리랑이 널리 유포되어 창녕군민들에게 문화예술을 향유하게 하고 자긍심을 심어줌은 물론, 고향을 떠난 향우들에게는 애향심을 고취하는 매개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음반을 나의 고향, 창녕에 바칩니다.

 

새로운 창녕아리랑음반을 기증 받으며

 우리군 창녕읍 송현리 출신 정창관 향우께서 일제강점기 때 불려졌다는 창녕아리랑을 새로운 창녕아리랑으로 음반 제작하여 고향에 기증하신 데 대하여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전 군민과 더불어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선생께서는 6개의 에디슨 원통음반에 담겨 있던 아리랑이 포함된 우리 민족 최초의 음원을 국내에 소개하시고, 전국의 숨은 명인명창을 발굴하셔서 국악음반을 제작하시는 등 전통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지극한 열정과 변함없는 애정으로 국악방송인 정창관의 국악음반세계를 진행하고 계시고, 객석 및 국립국악원 잡지인 국악누리에 기고하시는 등 지금까지의 노고에 다시 한번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새로운 창녕아리랑은 국악계의 유능한 함현상 작곡가가 참여하셨고, 작사는 우리 고향 대지면에 거주하고 계신 성기각 시인이 완성하셨으며, 토속적으로 이루어진 가사는 고향 창녕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젖게 만들고, 동심을 자극하는 어린이용 창녕아리랑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는 국악을 향한 새로운 꿈과 희망을 키워나가게 할 것이라 기대됩니다.

언제나 국악의 대중화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시고 저변인구를 늘려가는 데 크게 기여하고 계시는 정창관 선생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창녕아리랑을 취입한 남·여 소리꾼을 창녕아리랑홍보대사로 위촉하여 널리 홍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창녕군수 김 충 식

 

새로운 창녕아리랑출반 기념 축사

  창녕아리랑이라니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제 고향 창녕, 그리고 우리 마음 저 아래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글자의 조합은 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도 고향이 그리웠나 봅니다.

제 고향 창녕, 장마면 장가리는 야트막한 야산이 펼쳐지고, 논과 밭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멀리는 억새 숲이 무성한 화왕산과 영취산이 자리하고 가깝게는 낙동강변이 휘감고 지나가던 곳으로 아직도 눈 감으면 선하게 그려지던 고향 마을입니다. 그리워도 자주 가보지 못하는 형편인데요. 창녕의 풍광이 그려지는 듯 고향의 정취가 가득 담긴 창녕아리랑덕분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할 수 있을 거 같아 매우 반갑고 기쁩니다.

국악애호가이자 전문가로서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준비하셨다는 말씀, 기증의 의미를 희석시키지 않기 위해 창녕군의 금전적인 도움을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정창관 선생님의 마음이 많은 분들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창녕아리랑출반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서울특별시장 박 원 순

 

새로운 창녕아리랑이 출반된 것을 축하하면서

아리랑은 우리 민족 모두가 사랑하는 음악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우리는 아리랑을 부르면서 마음을 달래고 이웃과 웃음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방마다 그 지역의 아리랑이 전해지고 있는데, 강원도의 정선아라리’,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그리고 우리의 고향 창녕과 가까운 밀양에도 그 유명한 밀양아리랑이 늘 민초들과 함께 해 왔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1930)조선민요의 연구라는 이름하에 우리 창녕아리랑밀양아리랑과 같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몇 년 전에 정창관 후배로부터 듣고, 옛날 고향의 어른신들이 창녕아리랑을 어떻게 노래했을까 궁금하였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창녕아리랑을 만들어 출반한다는 소식에 기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창녕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지 고향의 어른신들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 새로운 창녕아리랑을 만들기 위해 창녕의 풍광을 노래에 담으려고 후배와 작곡자·작사자가 함께 창녕을 일주를 했다는 이야기, 어린이들도 부를 수 있게 만들고, 노래와 더불어 반주도 음반에 담고, 자료로 나운규 이전에 악보에 나타난 아리랑을 노래로 담고, 후배가 2007년 미의회도서관에서 발굴한 ‘1896724, 한민족 최초의 음원도 실었으니 정말 귀중한 음반이 출반된 것입니다.

창녕군의 재정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이 음반을 만들어 고향에 기증한다고 하니 정말 뜻 깊은 일입니다. 이제 새로운 창녕아리랑이 널리 알려져 우리 창녕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창녕아리랑의 출반을 축하하며 후배 정창관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재경창녕향우회 회장 박 재 룡

 

  창녕아리랑의 복원을 위한 거룩한 사업

 지금 창녕지방에서는 창녕아리랑의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8-90년 전에 창녕지방에서 불렀던 것으로 보이는 창녕아리랑은 그 동안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근래에 창녕 출신 정창관 선생이 문헌에서 창녕아리랑자료를 발견하고 이를 복원하고자 여러 가지 부흥운동을 펴고 있는 것이다.

본래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강원도와 그 주변 지역에 전승되던 것인데 조선 말기에 서울에 전해져 서울 아리랑이 생긴 뒤에 그 영향으로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등 각 지역 아리랑이 생성된 것이다. 20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고장마다 자기 고장의 아리랑을 창조하는 운동이 유행하였다. 그 결과 영일, 서산, 하동, 정읍, 순창, 공주, 양양, 창녕, 구례, 남원 등 그 밖에 수많은 지역에서 아리랑이 창조되었다.

당시에 향심이 강한 창녕지역의 주민들도 시대의 추세를 따라 창녕지역의 아리랑을 창조하는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에 창조되었던 대부분의 아리랑이 그렇듯이 창녕아리랑또한 전승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만 것 같다. 그리고 한 세기 가까이 흘렀다.

근래에 각 지역에서 자기 고장의 아리랑의 부흥운동이 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대구지역에 대구아리랑부흥운동을 들 수 있다. 뜻 있는 인사들이 묻혀 버렸던 대구아리랑의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복원하여 공연활동을 활발히 펴 이의 전승에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애향심이 강한 정창관 선생이 창녕아리랑이 있었다는 것을 문헌에서 발견하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자료 발굴에 나섰지만 정작 창녕아리랑의 자료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창녕아리랑의 문헌 자료뿐 아니라 창녕지역 노인들을 방문하여 옛 아리랑들을 조사하였다 한다.

그리고 아리랑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 연구를 위하여 조선 말기 아리랑은 물론, 일제 강점기 초기에 나온 아리랑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창녕아리랑복원의 토대로 삼은 것이다. 창녕지역의 문화가 담긴 창녕아리랑가사가 만들어졌고 창녕지역 전통가락이 담긴 창녕아리랑곡조가 재창조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창녕에서 문예활동을 하고 있는 성기각 선생이 창녕 각 지역의 문화를 담은 창녕아리랑가사의 재창조 작업에 동참하였고,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함현상 선생이 창녕지역의 전통 가락을 토대로 창녕아리랑의 곡조의 재창조 작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다. 이렇게 하여 남자용 창녕아리랑’, 여자용 창녕아리랑’, 어린이용 창녕아리랑등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재현하기 위하기 위하여 왕서은, 박수범 등 젊은 소리꾼과 여러 아마추어 소리꾼을 동원하여 가창하게 한 것인데, 이를 취입한 음반이 나온 것이다.

창녕아리랑의 복원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한 정창관 선생을 비롯한 창녕지역의 여러분들의 노고에 찬사를 드리며 이것이 부디 창녕지역의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창녕 지역 주민들에게 잘 전승되기를 빈다.

 

한국고음반연구회장 이 보 형

 

1930조선민요의 연구에 근거한 새로운 창녕아리랑과 그 음반제작에 대하여

: 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우리 창녕아리랑은 근거가 있는 아리랑이다.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147) 김지연이 쓴 글 조선의 민요 아리랑 2’(조선민요의 연구 3)에 다른 26개의 아리랑과 더불어 창녕아리랑이 언급되어 있다. 단지 2수의 가사만 수록되어 있지만, 당시에 창녕에 창녕아리랑이 불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몇 년 전에 이 사실을 알고, 혹시나 창녕의 어른신 중에 누군가 창녕아리랑을 부를 수 있나 싶어 수소문하였지만, 아는 분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 곡을 만들기로 하였다.

먼저 국악계에서 제일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함현상: 영화 귀향 음악감독)를 선정하고, 작사는 창녕에 살고 계시는 시인(성기각 선생)을 창녕군으로부터 소개받아 작년 4월경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창녕의 풍광을 음악에 담기 위해 작년 8월에는 작사자의 안내 아래 작곡자와 같이 창녕군 전체를 일주하였다. 제작자도 고향이 창녕이지만 창녕을 이렇게 샅샅이 다닌 적은 없었다.

노래 가사에 창녕군의 14개 읍·면을 넣기 위해 각각 읍.면의 가사를 8, 8절 가사에 담았다. 창녕에 내려오는 토속민요 가사도 넣고, 영산에 계신 지종 스님이 부른 아리랑 가사 중에서 일부를 차용하고, 어린이들이 부르기 쉬운 가사도 넣고, 마지막으로 1930조선민요의 연구에 실린 2절 가사도 활용하였다. 작곡은 1930년 가사에 실린 쾌조라는 표현을 살려 빠르고 즐거운 노래로 만들어졌다(작곡과 작사에 대해서는 뒤에 실린 작곡자와 작사자의 노트를 참조 바람). 반주는 국악방송예술단이 수고해주었다.

노래는 젊은 소리꾼이 부르도록 하였고, 토속민요는 아마추어 소리꾼들이 부르게 하였다. 어린이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어린이용 창녕아리랑도 수록하였다. 노래 곡 외에 반주도 담아 누구나 앞의 아리랑을 듣고 어울리는 반주에 맞추어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음반 한 장에 70분이 넘는 음악을 담을 수 있었다. 남는 공간에는 1929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1926101)이 음반으로 나오기 전에 발행되어 오선보 악보로 남겨진 아리랑을 보너스 음원으로 담았다. 실제 나운규 아리랑 음악은 1929년에 일본 콜럼비아레코드 40002/40003(아리랑-영화극 성동호. 노래: 유경이. 반주: 조극관현악단. 월광당조선악부)으로 처음 선보였다.

6곡은 국내 첫 음원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2007년에 발굴하여 소개한 ‘1896724, 한민족 최초의 음원’(이 음악이 담긴 6개의 에디슨실린더 원통음반은 현재 미의회도서관에 있음) 11곡도 담았다.

201581일 작사자·작곡자·제작자가 우포늪 방문시 촬영

 

<1930'조선민요의 연구' 자료>

그림 김지연, 조선민요 아리랑-조선민요의 연구(2)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146, 1930.6.

김지연, 조선민요 아리랑2-조선민요의 연구(3)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147, 1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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