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예술감독 이승묵 님이 보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부 :
다시 부르는 선조의 노래 / 인천 콘서트 챔버 이승묵
2022년은 한국 이민 역사의 12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902년, 제물포에서 하와이로 향한 발걸음이 한국 이민 역사의 시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하와이 이민에는 인천 출신이 상당수였고 대부분이 감리교 신자였습니다. 선대 이민자들은 타향에서 교회와 학교를 만들고 정부 기관을 대신할 조직과 군대까지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곳에는 음악이 존재했습니다. 어떠한 민족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국민성은 타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한국 이민 역사를 당시 음악으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초기 하와이 이민 역사에는 어떤 음악이 존재할까요. 그리고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1916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애국창가』즉, 애국가가 수록된 악보집이 탄생했습니다. 제목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노래집에는 타향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 조국의 독립 염원을 담고 순국열사를 추도하기 위해 부른 노래, 우리말을 잊지 않기 위해 부른 노래, 태극기를 찬양하는 노래, 대한제국 황실의 노래 그리고 국민회의 탄생을 경축하는 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은 가사를 통해 당시 이민자들이 어떠한 시대와 사회를 살아갔는지 반추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됩니다.
또한, 악보집 『애국창가』로 당시 창작 음악 역사의 발전 과정도 알 수 있습니다.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내한 선교사들의 종교 음악은 서양 음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동시에 포교와 계몽의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존재했습니다. 아직은 전문 작곡가가 탄생하지 않은 시기였기에 기존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가사만 바꾸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이 초기 이민 역사 속 대부분의 노래가 서양 조성 음악 형식의 오선보로 표기 된 것이 눈에 띕니다. 대체로 애국가, 찬송가, 군가 등의 선율을 빌려 가사를 새롭게 넣은 노래들이지만, 한국인 사회에 서양 음악의 전파 과정과 한국 창작 음악사의 양상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 2022년, 이민자의 세대가 바뀌고 그곳의 음악도 변하였습니다. 과거에 불렀던 노래가 계속해서 이어지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인천에는 당시 음악을 발굴하여 기록하고 다시 세상에 알리는 활동이 있습니다. 하와이 이민 초기 음악을 복원한 인천 콘서트 챔버의 음반 등이 그 작품들입니다. 특히 악보집 『애국창가집』의 주요 작품을 복원한 음반 제작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민경찬 명예교수님의 연구 업적과 더불어 대조선국민군단 박용만 선생의 후손(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박상민 교수님)과 초기 하와이 이민 역사의 주역이었던 내리교회의 현재 성가대가 함께 참여하여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이 같은 활동은 단순히 옛 노래의 고즈넉함을 감상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타향만리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려 했던 1세대 이민자들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농장 노동자였고 공동체 삶의 가치에 대한 신념으로 뭉쳐 조국을 그리며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대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음악은 이 모든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120년 후 다시 부르는 이민자의 음악은 현재 우리를 있게 한 선조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와 민족의 그늘에는 자신의 삶을 바친 선조의 노고가 있음을 기억하며, 본 음반을 타향에서 조국과 후대를 위해 헌신한 모든 선조에게 바칩니다.
역사의 보물이 빛을 보게 되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명예교수 민경찬
드디어 멀리 이국 땅 하와이에 묻혀 있던 역사의 보물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하와이로 이민 간 우리 교포들이 만들어 불렀던 ‘애국창가’와 ‘독립군가’가 음반으로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와이는 실로 우리나라 특히 인천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1902년에 102명의 이민단이 제물포 항구를 통해 하와이로 건너갔는데, 그 중 50명이 인천 내리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이민의 역사가 바로 인천에서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인천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간 분들은 먼 이국땅에서 더위와 싸우면서 고된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교를 만들어 교육을 하였고 또 대조선국민군단을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사람의 마음과 국민의 정신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는 데는 노래가 으뜸이다”라는 생각으로 『애국창가집』이라는 악보집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1916년 하와이에서 발행한 『애국창가집』에는 당시 국내에서 불렸던 애국창가 80여 편이 악보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곡 한 곡 모두 우리 조상들의 나라 사랑 정신과 혼(魂)이 담겨져 있는 노래들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모두 우리의 이민사, 독립운동사, 국어사, 국문학사, 음악사, 인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창가집』을 국가등록문화재 제475호로 지정을 했습니다.
본 음반은 『애국창가집』에 수록된 곡 10편과 하와이에서 불린 독립군가 1편을 복원 및 새롭게 편곡하여 취입을 한 것입니다. 취입한 곡은 하와이에서 결성된 대조선국민군단의 군가인 <국민군가>를 비롯하여, 하와이에서 울려 퍼진 <애국가>, 하와이에 거주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한 <국문가>,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찬양하는 <국기가>, 학생들이 행진하면서 부른 <작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신 애국열사를 추도하는 <영웅추도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한반도가>, 미주지역 독립운동 중심지인 대한인국민회 탄생을 경축하는 <경축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歌)인 <대한제국 애국가>의 하와이 버전인 <황실가>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면서 부른 <거국가> 등이 그것입니다.
본 음반은 인천 콘서트 챔버 대표 이승묵 씨의 헌신적인 노력과 주도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이승묵 대표는 그동안 인천 음악을 발굴, 연구 및 보급에 앞장 서 왔는데, 그 노력이 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음반 작업에는 내리교회 성가대와 독립운동가 후손이 참여를 하여 그 뜻을 더해 주었습니다. 내리교회 성가대는 대조선국민군단의 군가인 <국민군가> 등을 합창으로 불렀는데, 대조선국민군단의 단원 중에는 내리교회 출신이거나 그 2세가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한 층 그 의미가 크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의 후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상민 교수님이 첼로 연주자로 참여를 하였습니다. 박상민 교수는 박용만 선생의 친동생인 독립운동가 박용각 선생의 친손자입니다. 그러니까 큰할아버지가 만드신 <국민군가>를 복원하는 일과 <거국가>를 무반주 첼로 곡으로 재탄생 시키는 작업에 참여를 한 것입니다.
하와이에서 불렸던 애국창가와 독립군가가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아무쪼록 이 음반을 계기로 그동안 묻혀 있었던 우리 독립운동사와 인천 역사의 보물이 빛을 보기를 기원합니다.
‘애국창가’ 복원 작업에 참여하면서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박상민
‘애국창가’ 복원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신 인천 콘서트 챔버의 이승묵 대표님과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첼로 연주자로서 또 음악교육자로서 많은 활동을 해 왔지만, 이번처럼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하기는 처음입니다. 큰할아버지이자 독립유공자이신 박용만 선생이 만드신 <국민군가>와 많은 분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국을 떠나면서 부르신 <거국가>의 녹음 작업에 연주자로 참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저의 집 거실에는 독립유공자 증서가 걸려있었습니다. 저의 친할아버지인 박용각 선생이 독립유공자임을 알리는 증서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이를 계기로 저의 부친께서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임에 알려 주셨고 그 친형님이 유명한 박용만 선생이라는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큰할아버지인 박용만 선생과 친할아버지인 박용각 선생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동료 교수로부터 박용만 선생이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셨고 또 대조선국민군단의 군가인 <국민군가>를 만드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음악(첼로)이 전공인 저는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기회가 있으면 그 곡을 연주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인천 콘서트 챔버의 이승묵 대표님으로부터 음반 작업에 연주자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고 저는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연주한 곡은 <국민군가>와 <거국가> 두 곡입니다. <국민군가>는 찬송가의 선율에 가사를 붙인 것인데, 저는 가급적 큰할아버지의 뜻이 제 연주에 반영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연주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큰할아버지가 이 연주를 들으시고 기뻐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주했습니다. <거국가>는 마치 우리 큰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의 노래 같은 친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분은 주로 해외에서 활동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틀림없이 이 곡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가사 없이 무반주로 연주하였는데,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신 분들의 심정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는 마음으로 연주하였습니다.
이번 음반 작업은 저의 음악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고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저의 연주를 독립유공자와 해외에서 조국을 위하여 일하신 모든 분께 바칩니다.
아울러 이번에 제작한 애국창가 음반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선조들의 숭고한 뜻이 많은 사람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와이 이민사, 음반으로 만나다 /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김상열
“1902년 12월 22일, 비나 눈은 오지 않는 영하 4.5도의 날씨였다. 아침 8시 동서개발회사에 집결한 121명의 이민자는 인천해관에서 출국 심사를 마치고, 10시부터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월미도 해상에 정박 중인 겐카이마루에 올랐다. 가족과 지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오후 2시 포와(布蛙)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목포와 부산을 경유하는 이틀간의 항해 끝에 나가사키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19명이 탈락하였다. 102명의 이민자는 12월 29일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고베, 요코하마를 거쳐 끝없는 수평선 너머에도 계속 이어지는 바다를 건너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선상 검사에서 다시 16명이 탈락하여 86명만이 미국에 입국하여 오아후섬 와이알루아 농장의 모쿨레이아 캠프에 도착하였다.”
우리 민족 첫 공식이민의 여정이었습니다. 1905년까지 64회에 걸쳐 7,415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답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삶은 새벽 4시 30분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6시에 작업 장소에 도착한 한인들은 점심시간 30분을 제외하고 오후 4시 30분까지 10시간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노동하였습니다. 사탕수수밭에 물을 대는 일, 사탕수수를 베는 일, 사탕수수를 묶어 마차나 기차에 올리는 일 등을 하며 17달러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이민자들은 비싸고 낯선 음식 대신 숙소에 딸린 텃밭에서 채소를 길러 한식 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아 모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와이에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국은 외교권이 불법으로 박탈되고, 급기야 주권마저 상실되었습니다. 돌아갈 모국이 없어진 한인들의 혼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국으로부터 신부를 구하였습니다. 사진을 주고받으며 배우자를 선택하였고, 혼인을 위해 하와이로 온 여성들을 사진 신부라 불렀습니다. 사진 신부의 도착으로 이민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기초 단위가 형성되었고, 하와이 한인사회는 체류(滯留)에서 정주(定住)로 전환하였습니다.
정주를 결정한 한인사회는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909년부터 1920년까지 모은 독립자금은 300만 달러에 달하였습니다. 한인 가정의 두 달 치 생활비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또 무력 항쟁을 통한 독립을 꿈꾸며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였습니다. 대한부인구제회는 3·1운동 당시 죽임을 당하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에게 1,500달러를 송금하였습니다. 한인들의 결속을 위해 만든 모임들에서도 모국이 자연재해를 입었을 때 구호품을 보냈습니다.
한인기독학원을 매각하기로 한 동포들은 대한민국을 공업 대국으로 이끌 인재 양성을 위한 공과대학 설립을 발원하였습니다. 이에 인천시가 학교 대지를 제공하고, 중앙정부가 건립비용을 부담하고, 국민이 성금을 모아 1954년 설립된 공과대학이 인천의 인(仁)과 하와이 하(荷)를 한 자씩 따서 이름 붙인 인하대학교입니다. 재외동포 모국 공헌의 상징입니다.
재외동포는 항상 모국과 이어지려 하였습니다. 주권 회복에 목숨을 내걸거나 독립자금을 마련하였고, 모국에 구호품을 보내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정상 국가화를 위하여 해외공관을 마련해 주었고, 경제개발을 꿈꾸는 모국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습니다.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을 통해 이역만리에서 모국과 이어지길 희망했던 비롯한 재외동포의 삶을 공감하시길 바랍니다.
옛것을 되살리려는 사람들 / 내리교회 담임목사 김흥규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합니다. 옷도 새것을 좋아하고 집과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유행에 맞고 감각에도 맞고, 새것이 질도 더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해 아래에 새것이 없다”(전 1:9)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가 “브랜드 뉴”(Brand New), “새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실상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발굴해내는 일은 현재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반성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문화 예술 영역에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서양 문명의 경우, 현대적인 것이 제아무리 기발하고 찬란하다고 자부할지라도 수천 년 전 옛날 사람들도 오늘 못지않은 엄청난 문화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했음은 역사와 고고학적 발견들이 입증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옛것을 되살리기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한 분을 만났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천 콘서트 챔버 대표 이승묵 선생은 음악계에서 옛것들을 발굴하고 복원해내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양 문물의 유입과 유통에 관문이자 교두보 역할을 해온 인천에서 벌어진 옛 음악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승묵 선생은 저희 내리교회 코앞에 있는 용동 권번(券番)에서 예기(藝妓)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찾아내 되살려놓았습니다.
“인천근대양악열전”이라는 주제로 영영 소멸될 뻔했던 노래들을 완벽하게 복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에 수록된 곡들 가운데 몇 가지는 개신교와 성공회 천주교에서 불렀던 찬송가들입니다. 근대 음악이 곧 서양 음악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서양 음악의 효시는 자연스레 교회 음악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1885년에 서양 선교사님들로부터 시작된 저희 내리교회의 선조들이 불렀고 연주했던 곡들도 한국 근대 음악의 고전에 들만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와 내리교회 시온 찬양대는 이승묵 대표가 야심차게 준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 <애국창가> 음반 제작에서 특히 “국민군가”와 “경축가”의 녹음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구한말 선교사님들로부터 시작돼 1902년 12월에 인천에서 출발한 하와이 이민의 물꼬를 텄고, 서양 근대 음악의 소개와 발전에 일익을 감당한 내리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1903년 1월 하와이에 도착한 공식 이민단의 절반 이상이 내리교인들이였고, 195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내리 선조들이 한국 최초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전력이 있기에 내리교회와 교인들은 옛것을 되찾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할 중요한 책무를 느낍니다.
이 긴요하지만 외롭기 그지없는 일에 종사하는 인천 콘서트 챔버 이승묵 대표와 여러 단원들께 치하의 말씀을 올리고, 인천에 산재해 있는 옛것들을 복원하는 일에 함께 참여할 것을 다짐합니다.
하와이 애국가, 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교수 이유기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일이다. 1916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애국가≫라는 노래책이 등사판으로 간행되었다. 67쪽의 책에 7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가사와 악보가 다 기록된 것이 59편이고, 가사만 적혀 있는 것이 17편이다. 수록된 노래의 내용은 ‘애국가, 충효가, 군가, 권학가, 한글 예찬가, 국토예찬가, 망향가, 신체 단련 권장가, 찬송가 …’ 등이다.
이 책은 그 한 해 전인 1915년에 개성의 한영서원에서 만든 ≪창가집≫이란 노래책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한영서원은 1906년 윤치호가 설립한 중등 사립학교인데, 그 학교 교사들이 애국 가요가 수록된 ≪창가집≫을 등사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처벌을 받았다. 1915년 경무부 보고서에는 이 사건의 경위와 ≪창가집≫의 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하와이판 ≪애국가≫의 서문에 실린 간행 취지가 ≪창가집≫의 서문에 실린 간행 취지와 거의 동일하다. ≪애국가≫의 서문에는 ≪창가집≫이 압수당한 사실과, 흩어진 ≪창가집≫의 원고들을 수집하여 책을 엮었다는 사실도 적혀 있다.
이 노래책 ≪애국가≫에는 <애국가>(노래 제목)도 실려 있는데, 제2절과 제3절의 가사가 오늘날의 것과 아주 다르다. 제2절의 “바람 서리” 부분이 이 책에는 “바람 이슬”로 적혀 있다. “바람 이슬”은 ‘집을 떠나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먹고 잠’을 뜻하는 ‘풍찬노숙’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가사는 나라를 잃고도 좌절하지 않는 민족의 기백을 남산의 소나무에 빗댄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것이 후대에 “바람 서리”로 바뀌었다. 제3절의 “높고 구름 없이” 부분은 이 책에 “구름 업시 높고”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불리고 있는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는 가사와 곡조의 걸음걸이가 서로 어긋나고, “높고 구름 없이”가 “밝은”을 꾸며 주는 것이 아주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구름 없이 높고”로 바꾸어 놓으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요컨대 이 책은 <애국가> 가사의 정확한 의미와 변천 양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학술적 가치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흥미로운 낱말도 많이 들어 있다. ‘얼차려’도 그중 하나이다. 흔히 말하는 ‘민족의 얼’이라고 할 때의 ‘얼’은 잘못 만들어진 말로 알려져 왔다. ‘얼빠진’의 ‘얼’이 명사가 아닌데 명사로 오해하고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위당 정인보 선생의 실수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책에 수록된 <소년남자가>에 “얼차려”란 가사가 나온다. 늦어도 1910년대 중반 이전에 ‘얼’이 명사로 쓰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책은 눈물과 한으로 만든 책이다. 빼앗긴 나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만든 책이요, 가슴속에 나라 사랑을 아로새기기 위해 만든 책이다. 국권 회복의 의지를 단련하기 위해 만든 책이다.
그로부터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행히도 이 노래책이 좋은 인연을 만났다. 뛰어난 문학적 소양과 역사적 식견을 갖춘 인천 콘서트 챔버의 이승묵 대표를 만나, 먹물 속에서 잠자고 있던 가사와 음표들이 소리로 부활한다. 역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감격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정신에 달려있고, 국민의 정신을 함양하는 데에는 노래가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떠올리며 노래를 감상하면 감동이 더 커질 것이다.
하와이에서 부른 애국의 노래 /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늑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상당수를 빼앗기자,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안창호와 양기탁에 의해 주도․발기된 1907년의 신민회(新民會)는 각 애국계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나가면서 전국의 애국계몽운동을 국권회복운동에 직결시켰다.
신민회는 당시 민족 운동가들을 망라한 항일 비밀 결사단체로, 국권 회복과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실력 양성 운동과 민족주의 교육 그리고 민족 산업을 육성을 도모하며 이후의 모든 애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사실상 지도하고 추진하였다.
그들이 활동은 민족 역량을 대폭 증강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는데 신문화·신문학운동의 한 방법으로 ‘창가(唱歌)’를 널리 활용하였다. 창가는 개항과 함께 한국 사회에 수용된 서구의 악곡에 맞추어 제작된 노래가사란 뜻으로, 찬송가 등 서양식 악곡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신식의 노래’였다. 창가는 『독립신문』 등 당시의 신문 매체나 학회지, 그리고 교회에서 발간하는 잡지 등을 통해 주로 발표되었고, 나아가 학교에서는 창가를 공식 교과로 채택하여 가르치게 함으로써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여러 창가집들이 다투어 간행되고 교가, 독립군가 등으로 확산되면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고무하는 노래로 기능했기 때문에 온 국민의 노래로서 전국에서 애창되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이들 애국창가에 대해 불온 창가로 매도하고 급기야 금서 조치하였다. 국내외의 창가집은 대부분 압수되었고, 창가는 식민지화된 조국에서 더 이상 불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음악을 매개로 하는 항일과 독립운동은 중단됨이 없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국내외의 애국적인 노래들은 곧 항일가이자 독립가로 이어졌고, 해외의 한인사회와 민족학교로 번져갔으며 만주와 연해주에서 또 하와이와 북미지역 그리고 멕시코와 쿠바에서 한인들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국민의식을 심어주었다.
1916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등사본으로 인쇄된 ‘애국창가’가 간행되었다. 이보다 앞서 1914년 북간도의 광성학교 음악교재로 쓰인 최신창가집이 발간되었지만, ‘애국’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노래집으로는 처음이었다. 서문에서도 “국민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에는 노래가 으뜸으로, 우리 청년 애국 동지에게 소개한다”고 밝혀, 노래를 통해 국민의 정신 함양을 이루고자 함을 천명했다. 여기에는 악보형태의 60곡과 가사형태의 17곡을 포함하여 총 77곡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곡조는 기존의 찬송가와 외국의 민요 선율을 차용하였고, 민족적 감흥을 일으킬 수 있는 ‘애국’의 가사를 입혀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하와이는 미주지역 한인 이민의 시발점이자 미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1902년 12월 자의반 타의반 인천의 제물포에서 이역만리로 떠난 초기 한인 이민들은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이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은 군자금으로 모아졌고, 조국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와이에서 불러졌던 애국 창가는 노래를 통해 민족적 저항과 단결을 이루고자 했던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나라 사랑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기반으로 항일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출했으며, 자유와 해방을 기원하고 애국심과 독립을 염원했다. 하와이 한인들의 내면에 세대를 이어가며 장기간 항일투쟁을 가능케 한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애국 창가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근대 최초 하와이 이민과 여성 /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조선인을 태운 첫 이민선 갤릭호가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협궤열차로 사탕수수농장이 있는 오아후섬 북쪽 해변가 와이아루아 농장에 도착, 모쿠레이아 캠프에 짐을 풀었다. 제물포를 떠난 지 22일만의 일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해외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진출한 이민자 수는 대략 7,226명이었다. 오늘날 289만 여명에 달하는 미주 한인이민사회의 시작이었다. 현재 도착한 1월 13일은 ‘조상숭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민이라는 인위적인 인구 이동으로 형성된 사회로 그들은 조국이 식민지화 되고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긴 후 나라 잃은 설움을 생생하게 겪어야 했으며 미국사회의 인종차별까지 더해져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한인들의 민족운동에의 열망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실천력으로 구체화됐다. 하와이 한인들은 국외의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단체를 경제적으로 돕기 위해 독립금과 의연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식민지 조국의 각종 재난에도 구제금을 보냈으며 태평양전쟁 중에는 미국에서 발행된 전시공채를 구입하거나 전쟁으로 희생된 한인들을 위한 구제활동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하와이 한인사회의 여성들은 초기 신명부인회와 부인교육회를 시작으로 대한부인회, 대한소녀리그, 대한부인구제회, 영남부인회, 애국부인회, 대한인애국부인회 등의 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했다. 이들 여성단체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들에는 사진신부 출신의 여성들이 다수 있었다. 사진신부 출신이면서 여성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로는 김주수, 박금우, 심영신, 이희경, 이숙자, 이영옥, 임차순, 천연희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고, 이민을 통해 하와이 한인사회에 편입돼 활동한 인물로는 이정송, 전수산, 몰리 홍, 김도라, 김노디, 황혜수, 황마리아 등이 있다.
제한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당시 활동했던 하와이 한인여성들의 특징을 찾아보면, 출신지역으로는 평양과 황해도 출신이 많았고, 다음으로 경상도 지역, 그리고 지역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학력을 보면, 한국에 있었을때 적어도 소학교 과정 이상을 나온 여성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결혼의 경우, 사진신부의 경우는 남편과의 나이가 17세, 27세, 29세까지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었고, 재혼 혹은 그 이상의 사례를 보이고 있어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그들의 주요활동은 역시 단체결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특히, 대한부인구제회의 활동이 주요한 계기가 되고 있는데 다만, 독립운동 실천 방법상의 차이로 동지회계열과 국민회계열로 나뉘어져 활동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선교 및 교육활동 등도 여성활동의 주요 분야였다.
근대 해외 이민의 출구가 된 인천은 삼국시대 이래 문물이 유입되는 입구가 된 동시에 디아스포라의 출구가 되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이미 개항기에 국제사회를 경험했던 인천으로서는 하와이동포사회와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다문화사회로 변화하는 오늘날에 명실상부한 한민족공동체사회 구현의 중심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성들의 활동이 내재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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