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서에서 :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고 있나요?” / 인천 콘서트 챔버 이승묵
일제 강점기 인천 용동에는 기생조합 권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예인으로 이화자가 존재했습니다. 이화자는 권번에서 예인의 품행 덕목인 행신을 익히고, 가수로 발탁되어 레코드 취입과 함께 국내외를 누빈 스타였습니다. 한편, 이화자의 삶에는 명암이 존재했습니다.
21세기와는 다르게 여성과 예술인에 대한 인식이 저조했던 당시, 여성 예술인에 대한 처우는 낮았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이화자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레코드와 공연으로 음악 작품이 소개되며 인기가 높아질수록 권번 출신이라는 명함은 이화자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삶 한 편에는 그림자가 공존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화자일까요. 그리고 21세기에 이화자의 작품을 다시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사회적 현상이 비단 이화자라는 특정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당시 여성 예술인이라면 겪을 수 있었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편 이화자의 작품은 음악적인 측면에서 동시대 다른 예인의 작품과 다른 점이 존재하는데, 음악을 자서곡 형태로 구사한 이력입니다.
작품에는 여성 예술인으로서 겪는 시대적 현상과 개인적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이화자의 모든 노래가 이러한 방식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표적으로 <화류춘몽>, <화륜선아 가거라>는 권번 예인의 신분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아픔을 노래하고, <어머님 전상백>은 어머니에게 하소연하듯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작품으로 당시 여성 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시대적 한계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굴된 이화자의 100여 편이 넘는 작품 중 8곡을 선별하여, 서양 음악 형태의 ‘다시 부르기’를 기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9번째 트랙인 <어머니 전상백 재즈버전>은 이화자를 현시대 인물로 가정하여 현시대라면 어떻게 노래했을지 기존 작품을 재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시대를 살고 있나요?”의 질문은 “우리는 어떠한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나요?”의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음악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담은 표현 활동이 아닙니다. 음악은 인간의 문화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시대를 살아가며 다양한 시대적 현상과 맞닥뜨립니다. 시대적 현상은 음악 작품과 소비자에게 투영되거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음악은 시대를 대변하고, 음악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화자의 음악을 다시 부르는 행위가 철지난 유행가의 재조명이 아닌 한 개인의 삶을 넘어 여성 예술인의 시대적 한계와 우리의 지난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길 희망합니다.
과거 인천 용동 권번에서 시작하여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명성을 떨친 예인 이화자. 이 음반 한 장으로 한 인물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단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대변하는 음악을 남겨준 이화자의 작품으로 과거 여성 예술인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음악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거리를 던져 줍니다. 시대의 풍류를 주도했지만, 시대의 아픔도 함께 지녀야 했던 예인 이화자와 한국 근대 여성 예술인들.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한국 근대의 음악 발전과 예술인 인식 향상에 토양이 되어준 그들에게 이 음반을 헌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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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 /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대중음악은 그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시대를 아우르는 유행적인 요소와 오락성 그리고 상업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의 대중음악은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서양 음악이 들어오자 서양의 노래들이 번안되어 불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양상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민요와 유행 창가의 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 주권 상실과 3.1운동 실패에 따른 좌절감 속에서 서민대중들이 향유하는 대중가요의 초기 형식이 정착되었는데, 그 토대는 구전으로만 이루어지던 방식에서 유성기와 라디오라는 대중매체가 등장하고 저장과 소장의 개념이 생기면서부터였다.
192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대중가요는 일본가요와 한국가요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접근되었다. 일본의 엔카풍(演歌風)의 가요가 대중에 스며들어 번안가요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에게도 트로트풍의 음악이 자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향토색이 강조되면서도 당시 도시적 감성에 맞는 가요, 전통 민요를 계승하면서도 트로트의 반주 및 편곡 양식을 계승한 ‘신민요’가 등장했다. 신민요는 서양과 일본음악 등 여러 지역의 음악적 요소들이 다양한 형태로 결합한 산물이었으며 작곡가와 작사가에 의해 창작되었고, 특정 가수가 취입한 노래로서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1930년대 대중가요의 성공은 가수에 좌지우지되었다. 음반사는 권번 등에서 음악적 재질을 검증을 받은 배우 및 기생 출신 인물들을 발탁함으로써 안정적인 레코드시장을 만들고자 하였다. 1936년, 20세의 이화자(李花子)라는 권번 기생 출신의 시골 술집 여인이 하루아침에 대중에게 동정과 연민을 일으키는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1940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대중가요의 생산은 사회 체제와 질서, 지배이념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했다. 애상(哀想)조의 유행가 장르는 여전히 인기를 끌었지만, 식민지 한국의 음악인들은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조선총독부의 선전도구가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이화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민요가 퇴조한 이후에도 유행가 가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1942년 취입한 친일 가요 ‘목단강 편지’는 그녀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고 말았다. 이후 군국주의 일제의 팽창과 패전, 한국의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적 현실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한 비련의 여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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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여성, 이화자의 삶 /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개항과 신문물의 유입으로 우리 사회는 점차 근대로 이행됐지만, 여성들의 활동은 경제활동 영역에 비례해 예능이나 교육, 종교 방면 등으로 제한적이었고 사회적 인식에도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신여성의 등장, 이른바, '모던 걸' 시대가 도래했지만 재능이 뛰어난 여성들일수록 신파의 여주인공 같은 스토리를 적지 아니 만들어냈다.
그리고 끝내 비극으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 최초의 여성 성악가이자 배우 윤심덕, 그리고 신민요의 여왕 이화자의 사례가 그렇다.
특히, 인천과 관련된 인물인 이화자(李花子 1918?~1950)는 1918년 경 부평 출신으로 본명이 순재(順載)였는데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 권번(券番) 소속 기생이 되어 노래를 불렀다. 1935년 경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작곡가 겸 가수였던 김용환에게 발탁돼 가수로 진출하면서 당시 인기 절정이던 왕수복, 선우일선을 능가하는 민요가수로 주목을 끌었다.
1936년 데뷔한 이후 1943년까지 발표된 작품이 120여 곡으로 뉴코리아레코드에서의 ‘새봄맞이’, ‘섬 시악시’ 음반 발매를 시작으로, 포리돌레코드와 ‘오케레코드’에 이르기까지 ‘천일몽’, ‘꼴망태목동’, ‘어머님전상백(前上白)’, ‘화류춘몽’ 등 제작된 많은 작품들이 한국 대중가요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화자에게 현실은 야속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님과의 안타까운 이별이 그의 노래 주제였듯이 사랑 때문이었는지 신분의 벽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화려한 무대 이면에서 방황하던 그는 1940년대 아편중독으로 세간의 비난도 받았고 한때는 음독자살까지 기도했다. 1948년 아편을 끊고 가수로 재기하는 듯 했지만 1950년 병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의 격동기를 살았던 이화자, 예술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권번 가수로 출발한 신분적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범한 여성의 삶에도 안주할 수 없었던 그는 안식처를 찾아 방황하던 한 시대의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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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李花子)가 부른 7곡 노래의 가사 / 시인 김윤식
2집 음반에 수록된 이화자의 노래 7곡은 모두 시인이면서 유행가 작사가로 활약했던 조명암(趙鳴岩)이 작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조명암이 유행가 작사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당시 서울의 유수한 OK레코드사 사장 이 철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1938년 때마침 이 레코드사에 전속 가수가 된 이화자의 노래 가사를 도맡다시피 작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여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는 이서구(李瑞求)의 평대로 1938년 무렵 떠오르는 샛별로 큰 인기와 함께 등장한 이화자와 또 당시 섬세한 필치의 가사 작가로 명성을 얻은 조명암을 조합해 레코드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굳히려는 이 철의 복안이 아니었나 싶다.
2집 수록곡들의 가사에 드러난 정서적 특징을 살펴볼 때, 대체로 연정(戀情)이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토로한 「마음의 화물차」 「살랑 춘풍」 「님 전 화풀이」 「가거라 초립동」 등의 4곡과 기생이라는 개인 신분에 대한 비애와 한탄, 체념의 감정을 드러낸 「화류춘몽」 「화륜선아 가거라」의 2곡, 그리고 마지막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회오하는 「어머님 전 상서」로 나눌 수 있다.
이 7곡은 신민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 중반 이후, 1940년대 초에 걸쳐 불린 노래로서 분명 신민요풍의 노래이지만, 그 가사 내용으로 볼 때는 1920년대부터 또 한 갈래 우리나라 가요의 흐름이었던 유행가, 곧 트로트 계열의 노래에도 가까이 가 있다는 점이다.
“트로트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비애스러운 탄식, 타향을 떠도는 나그네 처지에 대한 한스러움 등을 드러내는 진지한 태도의 노래라면, 신민요는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이나 향토적 삶을 즐겁게 표현하는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앞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정의(定義) 선상에서 볼 때, 조명암의 가사에서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음의 화물차」「화륜선아 가거라」 등에서 보인다.
멋모르고 받은 사랑은 병을 샀구려/구름다리 우르릉 우르릉 밤차는 간다마는/병들어 썩은 눈물 실어 보낼/아 화물차는 언제 오나(마음의 화물차 1절)
천금 같은 내 청춘에 이별이란 웬 말이냐/떠나는 화륜선에 물결이 출렁/내 품속의/울던 님아 마음이 변해/원수로구나/오냐오냐 잘 가거라(화륜선아 가거라 2절)
이 같은 불가능한 사랑 노래 외에도 조명암은 그녀의 기생 신분에 대한 비애도 가사에 드러낸다. 이렇게 개인적인 정서를 노래한 점에서도 이 노래들은 신민요에서 한 걸음 나아가 유행가에 근접한 인상을 준다.
한 떨기 짓밟히운 낙화 신세/마음마저 썩는 것이 기생의 도리냐(화류춘몽 3절 부분)
이밖에 이화자의 대표 노래 「어머님 전 상서」는 그녀의 자전적 노래로 당시 세인의 가슴을 울린 명곡이었다. 가수와 작사가 두 콤비로서 이화자 개인의 인생 편력을 섬세하게 꿰뚫어 본 조명암의 작사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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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엔터테이너 / 인천광역시립박물관장 유동현
‘기생’은 사라진 직업이다. 나는 그 기생을 실제로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김포 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그 집 건넌방에 ‘기생’이 세 들어 살았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 연령의 자그마한 체구였는데 늘 쪽진머리에 하얀 분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그는 가끔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곤 했는데 나는 호기심에 몰래 몇 차례 그 기생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한쪽 벽에 알록달록한 치마저고리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고 한 켠에는 앉은뱅이 화장대와 장구가 놓여있었다. 졸지에 어린 나이에 기방(妓房) 출입을 한 것이다. 당시 나는 그가 기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더구나 기생이 뭐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다.
그 후 기생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속에 비친 기생은 그야말로 ‘기생충’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 연출되었다. 기생이 매음하는 창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일제의 치밀히 계산된 문화침략 중의 하나였다. 인천 중구 용동 골목에는 1929년 놓인 돌계단이 있다. 거기에는 ‘龍洞券番(용동권번)’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10여 년 전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 진한 분 냄새 풍기던 권번이 있었던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기생 동네’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시멘트로 돌계단의 글씨를 발라 버렸다.
이랬던 ‘기생’이 대중스타의 원류로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들은 기생학교에서 악기와 노래 그리고 궁중무, 승무와 살풀이춤 등 민속춤을 배우고 글씨와 그림을 익힌 종합예능인이었다. 또한 조선의 풍속을 소개하는 관광 홍보모델이었으며 한복 입음새의 새로운 유행스타일을 만들어낸 패션 리더였다.
개항장과 이웃한 용동권번에 속한 기생들은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이벤트 행사 도우미로도 활동했다. 1899년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자 철도 회사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기생을 활용했다. 주요 역 정거장 마당에 ‘용동기생 초선’ ‘인천명기 앵금’ 하는 식으로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였다. 아예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객차 칸칸을 왔다갔다하며 승객 유인에 한몫했다. 이를 보기 위해 한량들이 비싼 왕복 기차표를 끊고 승차하기도 했다. 오늘날로 치면 새로운 마케팅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신여성답게 현실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897년 1월,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은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냈다. 노래와 웃음을 팔아 치마 속에 넣어뒀던 쌈짓돈을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선뜻 내놓은 것이다.
김포 할머니 댁 그 기생은 가끔 툇마루에 앉아 장죽 담뱃대를 입에 물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생애 처음, 엔터테이너를 만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용동권번에 속했던 이화자, 김일타홍, 이화중선, 박미향의 동무였을지도 모른다. <이화자 다시 부르기>를 통해 그들은 우리들의 엔터테이너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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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근대, 가요 - 이화자를 찾아낸 이승묵 / 평론가, 문화재위원 윤중강
이런 음반이 나오길 기다렸다!
2000년대 초반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인천은 당시 ‘원도심’의 실제적 개념조차 분명치 않았다. 인천만의 독특한 문화를 구체적으로 찾아내는데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좀 기대했다. 인천이 근대에 관심을 보였다. 인천만의 고유한 콘텐츠가 무엇인지 인지했다. 건축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시각적 관심에서, 음악과 같이 마음으로 느낄 수 청각적 관심으로 옮겨가길 희망했다.
10년을 기다려왔다.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인천의 근대음악을 일으켜 세울 ‘큰 바위 얼굴’은 바로 ‘인천악사’ 이승묵이었다. 인천 콘서트 챔버가 인천의 근대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인천악사(仁川樂士) 이승묵은 인천악사(仁川樂史)를 정리해 나가고 있다. 알려진 음악을 더 알리고, 몰랐던 음악을 발굴해 내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일찍이 근대도시(近代都市)를 표방한 항도인천(港都仁川)의 근현대음악사가 이승묵과 인천 콘서트 챔버를 통해서 찬찬하고 꼼꼼하게 복원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번에는 이화자(李花子)의 노래다! 인천과 함께 한 미스터리 인물. 그녀는 본명(이순재) 정도가 알려졌지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아무도 모른다. 부평의 작부(酌婦)에서 출발해서 용동의 기생(妓生)을 거쳤다고 전한다. 그녀를 거기서 실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카더라’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작곡가이자 가수, 음반기획자인 김용환이 이화자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상상해본다! ‘섬시악시와
’새봄맞이‘를 취입하는 이화자의 모습이 그려 본다! 김용환은 얼마나 설랬을까? 이화자는 당대 인기가수 왕수복과 선우일선, 이난영과 박향림이 갖고 있지 못하는 정조(情調)가 있다! 노래 자체는 물론 ‘창자(唱者)의 이면(裏面)을 궁금하게 만드는 신비한 마력’이 있다!
그녀의 노래가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그녀가 숨기고 싶어한 전력(前歷)과도 연관이 있다. 그녀의 노래의 배후에는 경서도창(京西道唱,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이 있다. 그러기에 더욱더 그녀를 부평에서 보고, 용동에서 활동했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화자는 신민요 가수로서는 드물게 전통적 음계와 전통적 창법이 매우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신민요’와 ‘트로트’에 자연스럽게 적용했다.
이화자는 ‘뉴코리아레코드’를 시작해서 ‘폴리돌레코드’를 거치면서 ‘오케레코드’에 전성기를 구사했다. 오케레코드와의 첫 번째 작품 ‘꼴망태목동’(1938)은 신민요사의 걸작이다. 이화자가 ‘꼴망태목동’가 불렀기에, 김용환도 ‘꼴망태아리랑’(1939)이 탄생될 수 있었다. 불과 5년도 안 된 사이,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뀐 거다. 이젠 아무도 이화자의 인기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
이화자에 의해서, 조선의 대중가요에 ‘자서곡(自書曲)’이란 명칭이 등장했다. 이화자의 노래는 모두 부르는 사람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마치 누군가에게 진솔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편지글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이런 노래를 통해서 넌지시 세상에 알려준 것 같다. 이화자가 화류춘몽(花柳春夢)을 부를 때, 인천의 용동권번을 비롯해서 전국의 기생들이 모두 이건 자신의 얘기라고 하면서 울면서 경청했다는 사실은 지금의 우리도 기억해야 한다.
이화자의 노래 중에서 기록으로만 알려진 노래 ‘월미도’가 있다. 이 노래가 이승묵과 인천 콘서트 챔버를 통해서 새롭게 녹음되었다! 이화자는 ‘월미도’를 부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서럽고 버거운 심정이 복받쳐올 때, 그녀도 월미도를 찾았을 거다. 인천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인천, 근대, 가요. 셋은 뗄라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것을 연결해주는 이승묵이 고맙고, 이 음반이 더욱 값지다. 일제강점기의 한 여가수의 노래만으로 음반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대한민국에서 매우 특이하지만, 숨겨진 명곡을 발굴했다는 의미도 크다. 음반 속에 담겨진 ‘월미도’는 기악곡이다. 앞으로 노래의 가사가 정확하게 복원되고, 인천 콘서트 챔버와 또 다른 악인(樂人)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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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변용과 온고지신 / 소설가 이원규
한국의 클래식 음악 연주가들이 세계적 명성을 얻고 K팝이라는 소(小) 장르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음악이 찬란히 빛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옛 가수 이화자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까닭은 부드러움과 탄력을 겸비한 음색과 창법에다 면면히 흘러온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식이 그릇이고 내용이 거기 담긴 음식이라면 그의 노래는 여전히 먹을 만하다.
이화자는 라디오방송 출연과 축음기 음반으로 가요의 대중화를 열어간 가수였다. 일본 양식의 잡가 풍 가요에 바탕을 두었지만 거기 우리 음악의 전통을 접목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악극 무대에도 섰다. 일제강점기 피압박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들은 그의 노래에 웃고 울었다. 자전적인 가사를 담은「어머님 전 상백」과 「화류춘몽」은 강한 호소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깊은 연민과 심리적 동일시를 느끼게 했고 큰 위안을 안겨 주었다.
이화자의 노래에는 민족수난기 집단경험과 고난과 슬픔으로 젖은 집단무의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인천권번의 기생으로 살다가 밤하늘의 별처럼 찬연히 떠올라 한 시대를 풍미하고 샛별 지듯 허무하게 사라져간 그의 생애는 그래서 더욱 우리를 애틋하게 만든다.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이화자의 노래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가치 있는 전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알맞은 예술적 변용이 필요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방탄소년단이나 싸이 등 K팝을 이끌어가는 뮤지션들의 음악도 우리의 옛것을 받아 녹이며 세계를 향하여 새 길을 열어간 것이다. 온고지신 바로 그것이다. 이화자 노래의 새로운 변용은 소중한 음악적 자산을 더 큰 가치로 확장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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