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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창 관 / 홍콩 샹하이 은행 |
소리, 그리고 음악은 우리의 귀에는 같게 들려오지만,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마음은 각기 다르다. 좋은 소리, 좋은 음악을 찾아 반 평생을 헤메고 있지만, 아직도 좋은 소리, 좋은 음악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쉽게 충무로나 청계천에서 만날 수 있다. 음악은 고독한 취미이며, 자아지향적인 취미이다. 음악은 공간을 넘어 청각으로 들어와 우리 마음 속에서 용해된다. '어떻게 느낀다.'는 것은 청각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어릴적에 우연히 들었던 한 장의 유성기 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아직 가슴에 새기고 있는 사람, 처음 오디오를 사서 들었던 그 소리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음악이 어제와 다르게 들리는 것은 자기 마음이 어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 들을만한 오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책장에서 음악에 관한 책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고, 음악 잡지 한 권이 보이지 않을 때 또한 나는 슬프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에 관한 책과 음악 잡지를 사지 않으면, 누가 음악에 관한 멋있는 글을 쓰고, 누가 음악에 관한 책을 만들겠는가? 클래식 음악은 트렌지스터보다는 진공관으로 들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 스피커는 탄노이가 최고이고, 앰프는 맥켄토시가 최고이다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나를 슬프게 하고, 또 이런 사람들이, 스피커와 앰프를 바꾸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나는 더욱 슬퍼진다. 외국 책에 소개된 명반만을 최고라고 선전하는 레코드 평론가와 레코드를 보지도, 듣지도 않고 글을 쓰는 레코드 관련음악 기고가들, CD소리와 LP소리의 차이를 제대로 구별도 못하면서 CD소리와 LP소리의 차이를 얘기하는 오디오 평론가, 자기 가게의 오디오만 좋다고 선전하는 오디오 장사치들과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구별도 못하면서, 무조건 값 비싼 스피커의 소리를 좋은 소리라고 확실하게 주장하는 사람, 국산 오디오는 클래식 음악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떠벌리는 외제 오디오광, 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최고의 명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의 음악 공간에서 단지 몇 십장의 레코드가 손때가 묻디 않은 채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을 볼 때, 라이센스 레코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라이센스 레코드의 음질을 도매값으로 매도해 버리면서, 그 많은 오리지날 레코드 중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의 레코드를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헤메는 사람, 대부분의 레코드가 개봉도 되지 않고 꽂혀 있는 사람이 나를 아주 슬프게 한다. 수많은 레코드 중에서 우리국악 레코드 한 장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얘기할 때, 가장 나를 슬프게 한다. 이러한 사람이 국악 레코드를 조금만 사 주었어도, 지금 우리는 좋은 국악 레코드를 들을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국악 레코드를 모으면서 '지금의 국악 레코드 발매 현황이 20년전 보다 못하구나.'하는 느낌을 받는다. 판소리 한 마당 전곡 레코드는 살 수도 없는데, 오페라 전곡 레코드는 40여 종류나 발매되어 있고, 판소리 발췌판 한 장 없는 것이 현 국악 레코드계의 실태이다. 국악 레코드를 사지 않는 음악 애호가의 잘못 때문일까? 영리만 추구하는 레코드 제작회사의 과오 때문일까? 국악 보급에는 관심이 없는 국악인의 무관심 때문일까? 스포츠에만 너무 국력을 기울이는 정부의 시행착오일까? 이 모든 당사자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지성인이라면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지 어떻게 대중가요를 듣나?' '대중가요야 적당한 국산 오디오로 듣고, 클래식 음악은 제대로 된 오디오로 들어야지.'라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는 사람, 음악을 좋아한다면서도 음악회를 가지 않는 사람, 세계의 유명한 오케스트라나 연주회가 내한 공연할 때에는 빠짐없이 연주회장에 나타나면서도, 집에서는 거의 음악을 듣지 않는 돈 많은 사람도 나를 슬프게 한다. 올림픽과 더불어 열리는 각종 문화행사가 나를 슬프게 한다. 볼쇼이 발레단의 표를 사려고 길게 늘어선 행렬이 나를 슬프게 하며,「볼쇼이 발레 하루만에 매진」이라고 매직펜으로 굵게 쓴 예매처에서 알리는 글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라·스칼라 오페라단의 투란도트 공연때, 막간마다 "앵콜"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며 박수치는 사람도 나를 슬프게 한다. 이 열광하는 사람중에는 과연 투란도트 음악을 몇 번이나 들어보고 공연장에 왔을까? 투란도트 공주와 칼라프 왕자가 부르는 음악에 보내는 앵콜인가? 금빛 찬란한 무대 장치에 보내는 놀라움인가? 라·스칼라 이름 앞에 휘청거리는 부라보인가? 이것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고 미사여구로 찬사의 무대평을 써내는 음악 평론가가 나를 몹시 슬프게 한다. 「음악가이기보다는 음악 철학가이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음악화 한 말러의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들을 때, 그 숙연하고 냉혹한 그리움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부모가 제 아이를 사랑하고 제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과 깊은 슬픔이 있을까」라고 말한 시인「고은」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이 구절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워하는 노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무 관련이 없다. 말러가「뤼케르트」의 시에서 감명을 받고 작곡하였다. 또한 이 곡이 작곡된 1900∼1902년 무렵에는 말러에게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으므로,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이 작곡의 동기가 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렇듯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을 모두 나열해보아도, 오늘도 위대한 음악가의 음악을 집에서 들을 수 있는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나를 슬프게 하지만,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아니다. |